시대요구 맞춰 융합학과 개설 속속 증가

전문성 있는 교수 부족, 커리큘럼은 '재탕'
속도보다 철저한 준비ㆍ시스템 마련 시급

“서울대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을 2년 전에 처음 설립했는데 그동안 ‘융합’이라는 글자가 포함된 대학·학과가 50개나 생겼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최근 입학설명회에서 한 말이다.  ‘융합’이 대학가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관련 학과 개설도 급증하고 있다. 창조적 인재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대학들도 학문간 벽을 허물고 새로운 학문 창출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선 학문간 융합이 아닌 학과 이기주의와 시스템 미비 등으로 인해 무늬만 융합한 전시학과가 속출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진정한 융합교육을 위해선 속도를 내기보다 시스템과 내실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대학마다 융합학과 신설 ‘붐’= 14일 대학가에 따르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수도권 대학은 물론 지역 대학에서도 융합교육이 활발하다. 대학원은 물론 학부과정에서도 융복합 관련 학과 신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기존에 이공계열서 활발하게 이뤄졌던 융합교육은 최근 인문사회계열까지 학문의 벽을 허물고 있다.

 ▲ 창조적 인재를 원하는 시대 요구에 따라 학문 간 벽을 허물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학문융합'이 대학가의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대학마다 융ㆍ복합 관련 전공과 학과를 잇달아 설치하는 추세다. 
서울대는 2009년 3월 수원 광교 테크노밸리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을 열었다. 이곳은 나노융합학과와 지능형융합시스템학과, 디지털정보융합학과, 분자의학 및 바이오제약학과 등이 개설돼 있다. 학과 이름처럼 기존 학문 사이의 벽을 왕래하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한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뒤이어 연세대가 한국형 MIT미디어랩을 표방하는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소를 올해 초 인천 송도에 위치한 국제캠퍼스에서 출범시켰다. 연세대는 이곳에 융합공학부를 신설하고 3년제 학부와 4년제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된 대학원 등을 구성했다.

고려대는 인문 사회학 분야에서 학문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기술경영전문대학원을 통해 경영, 법학, 의학전문대학원 간의 협력하는 융합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건국대도 2009년 건국대 MOT 밀러 스쿨을 개설, 경영과 공학을 접목하는 융합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지역대학에서도 융합학과의 신설 바람이 불고 있다. 대구가톨릭대는 지난해 디자인 대학에 디지털디자인과를 신설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의 융합으로 탄생한 디지털디자인과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이해와 디지털 감성을 갖춘 젊은 디자이너를 양성한다는 취지다.  대구한의대도 지난해 IT의료산업학과를 신설했으며 한의학과 미술치료가 융복합된 한방미술치료학과와 한방스포츠학과 등을 운영하고 있다.
 
계명대는 지난해 건축학대학 생태환경디자인과와 체육대학 스포츠마케팅학과, 의과대학 의용공학과 등 3개 융합 학과를 신설했다. 생태환경디자인과 김수봉 학과장은 “건축, 디자인이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건축 전공 학생들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며 “창의적 인재를 원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건축학 외에도 글쓰기, 말하기, 발표 수업 등을 통해 인문학적 사고를 동시에 길러주고 있다”고 말했다.

■ 무늬만 융합…커리큘럼은 허울 뿐 = 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따라 급증한 융복합 학과는 그 속도와 숫자만큼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충분한 준비와 체계 없이 학과통폐합하면서 마찰음을 내고 있는 것.

이들 학과의 실제 커리큘럼을 들여다보면, 교과목 명칭만 바뀌고 배우는 내용은 비슷하거나 똑 같은 ‘무늬만 융합학과’라는 지적이다. 또 학과 이기주의로 인해 교수들 간 융합이 어려워 불협화음도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서울 모 대학의 융합학문 관련 학과는 최근 해체위기에 놓였다. 개설한지 1년 만의 일이다. 대학 관계자는 “학과 이기주의로 인해 교수들부터 융합이 잘 안 됐다”며 “커리큘럼도 학문융합이라고는 하지만 과목 명칭만 바뀌고 실제 교육내용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오히려 전공과목 이수 비율이 줄어들어 4년 동안 전문성 있는 인재보다는 보편적 교양인을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며 “전공이 애매해 취업률이 낮게 나온 것도 문제”였다고 밝혔다.

■ 학과 이기주의도 ‘걸림돌’…곳곳서 '마찰음' = 학교마다 융합학과를 설치해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지만 실상은 비인기학과의 통폐합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국대는 최근 대학 경쟁력 제고를 위해 11개 학과를 통폐합하는 방안을 내놨다. 문예창작과는 국어국문학과로, 물리학과는 반도체과학과로 통폐합한다. 북한학은 타학과와 연계전공으로 , 경영학·회계학·경영정보학은 단일 전공으로 합해 융합학문을 실시한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통폐합이 진행되면서 마찰음을 내고 있다. 권기홍 동국대 총학생회장은 “학문구조개편안은 ‘트렉제’가 핵심인데, 이는 합해진 두 가지 전공 중에 한 가지를 집중 적으로 이수하면 그 학과 전공으로 졸업시켜준다는 것”이라며 “겉보기에는 두 학과를 합해 융합학과를 만드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인기 없는 학과는 없애겠다는 속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불만은 교수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지방대 한 교수는 “독문·불문·노어학과와 같은 언어학은 같은 울타리 안에 넣는다고 학문적 융합 효과가 생길 수는 없다”며 “비인기학과의 통폐합을 융합학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융합교육 시스템부터 마련해야"

[인터뷰]정선양 건국대 MOT밀러 스쿨 원장

 ▲ 정선양 건국대 MOT 밀러 스쿨 원장 

“WCU사업 등 융합학문에 대한 정부지원이 끊기면, 사업비를 받아 개설된 융복합학과의 80%는 폐과할 것입니다. 그 만큼 융합학문에 대한 시스템이 부족한 것이 국내의 현실입니다.”

12일 건국대에서 만난 정선양 건국대 MOT(기술경영)밀러스쿨 원장은 “융합학문의 정착을 위해선 현재 국내에 개설된 융합학과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정 원장이 도입한 MOT밀러스쿨은 2009년 국내 대학 중 최초로 기술과 경영을 접목한 융합학문을 시도한 곳이다. 학부와 대학원, 최고기술혁신경영자(CTO)과정까지 이곳에서 총괄한다.

정 원장이 지난 3년간 융합교육을 해오며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국내 융합학과에는 지속 발전 가능한 체계가 없다는 것. 그는 국내 융복합 학문의 현실은 WCU(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사업 등 정부지원을 통해 연명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지원과 시대요구에 따라 융복합학과가 늘어났지만 실제 자생력을 갖춘 곳은 드물다는 설명이다.

결국 해법은 정부지원이 끊겨도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있다. 관건은 전문성 있는 전임교수의 확보다. 정 원장은 “전임교수가 외부강사보다 융복합 필수과목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해 학생들을 잘 가르치지 못 하는 게 현실”이라며 “융복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학생들을 책임지고 가르칠 수 있는 전임교수 확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존 교수들도 학과 이기주의를 버리고 평생 지속할 수 있는 융복합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르치겠다는 소명의식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며 “정부는 자생력 없는 대학의 경우 연구비를 반납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해 지속성 있는 융복합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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