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진 본지 논설위원·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대략 30년이다. 필자가 사회학에 입문한 것은 1981년이고 지금껏 이 학문에 매달렸다. 물론 처음부터 사회학을 업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이러저러한 이유와 계기로 이 학문을 내 직업을 삼은 행운을 누리는 중이다.

이것이 행운인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사회학의 가장 큰 매력은 생활하면서 갖게 되는 여러 호기심들을 풀 수 있는 안목과 도구, 그리고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데 있다. 그런 탓에 이른바 전공영역이 사뭇 다양하다. 교육, 음모론, 자기계발, 세대 등이 필자의 관심영역이다.

지난 10월 26일의 서울시장선거는 나를 다시금 세대라는 문제에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세대, 더 정확하게는 연령대별로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나경원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박원순 후보를 지지한 이들은 나이가 적다. 20대의 69.3%, 30대의 75.8%, 40대의 66.8%가 박원순 후보를 지지했다. 50대는 56.5%, 60대는 69.2% 정도가 나경원 후보에게 투표했다.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연령대의 지지성향은 다시금 세대를 주목하게 만든다.

사실 세대연구자로서 이러한 주목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두 가지 이유로 이것이 조금 당혹스럽다. 첫째 혼란스런 세대 용어 사용, 둘째 그것의 도구적 활용이다. 일반적으로 세대는 연령집단과 동의어로 쓰인다. 그러나 세대연구자들은 연령집단세대와 코호트세대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전자는 생물학적인 연령을 중시하지만, 후자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연령집단세대는 특정한 연령단계에 따라 나타나는 변화, 예컨대 나이가 먹으면서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 코호트세대는 인격-혹은 정체성-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경험한 역사적 사건들이 시간이 지남에도, 즉 나이가 들어감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 가정에서 출발한다.

연령집단세대와 코호트세대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후자는 연령과 상관없이 유지되는 과거의 경험을, 전자는 예전의 경험과 관계없이 나타나는 연령의 효과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결과를 해석하는 데 두 종류의 세대 개념이 조심성 없이 혼용된다. 이를테면 60대 이상은 ‘보수적’ 연령집단세대로, 40대는 코호트세대(‘386’ 혹은 ‘486’)로, 20대와 30대는 다시금 ‘진보적’ 연령집단세대로 설명된다.

아마도 이런 혼용은 세대가 도구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세대는 화자의 입장을, 특히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20~40대를 우려스런 시선으로 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이들을 호도했다.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입장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50대 이상의 세대들은 변화를 감당할 의사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수구-옛것을 지킨다는 사전적 의미에서-세력에 불과하다.

선거결과와 같은 정치적 사건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성의 이름으로, 정확하게는 과학적 편집증으로 모든 정치적 해석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다만 문제는, 특히 정치적 엘리트들의 정당화 욕구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선거결과의 이유는 자명하다. 집권세력들이 일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을 선택했던 사람들, 무엇보다 20~40대에게 약속했던 바를 전혀 지키지 못했다.

이를 고려하면 서울시장선거는 그들에게 패배가 아니다. ‘선전(善戰)’한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자리를 그 당의 사람이 다시 차지하기는 당연히 힘들다. 그럼에도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런 의미에서 집권당은 진정한 연령집단세대 정당이다. 흔들리지 않고 참여의사도 높은 특정 연령층의 정당 말이다. 내년에도 세대정당은 선전할 것이 자명한 만큼 다른 연령집단들이 지지하지 않을 것도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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