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훈(아주대, 영문학/문화콘텐츠학) 

요즘 인문학과의 융합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드높다. 포스텍이 인문기술융합연구소를 개설하여 공학에 인문학을 접목시키려 하고, 삼성전자 사장 시절 '황의 법칙'으로 유명했던 황창규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장이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차세대 기술의 화두로 내세우고, 대학의 인문대나 경영대에서 CEO 대상 인문강좌가 유행하며, 정부가 인문기술융합연구소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몇 년 전만해도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비실용 학문으로 찬 밥 취급받던 인문학이 왜 갑자기 구애의 대상이 된 것일까? 최근의 인문학 열기 뒤엔 스티브 잡스의 신화가 있다. 수익률이 떨어져가던 IT산업구조를 혁신하여 다시 붐을 일으킨 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창조한 잡스가 한 때 인문학을 전공했고, 그가 기술과 인문학(liberal arts)의 접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버럴 아트는 문학, 사학, 철학으로 대표되는 전통 인문학 분야뿐만 아니라 예술, 디자인, 종교 등도 포함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인문학 열기를 추진하는 엔진은 잡스처럼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지 성공과 욕망을 비판적 거리와 상상력으로 성찰하거나 재현하는 인문학 정신이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의 인문학 융합은 잡스가 영웅으로 떠오르기 훨씬 전부터, 즉, IMF구제금융, 벤처산업 붐, 기업구조조정과 더불어 본격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 최근 15년 이상 동안 인문학의 실용화란 맥락에서 이루어져왔다. 시장주의로 위기에 몰린 일부 대학이 역사, 철학, 국문학 등 인문학과를 콘텐츠학과로 전환하여 영화, 캐릭터, 게임 등의 콘텐츠 개발에 필요한 소재(신화, 전설, 역사, 인물 등)이나 기법을 연구했다. 콘텐츠산업의 성장 잠재력을 본 카이스트의 문화기술대학원이나 중앙대의 예술경영대학원 등 전문대학원이 기술과 경영을 예술, 인문학과 접목시키는 연구를 해왔다. 최근에는 문학의 스토리텔링기법이 영화, 게임 등 서사장르뿐만 아니라 로커티브 미디어 콘텐츠, 공연전시기획, 경영마케팅, 법정담론, 의료서비스, 관광프로그램, 도시설계, 교통설계, 자연생태사업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기술인문학, 경영인문학, 예술인문학, 콘텐츠인문학이 이미 국내에서 조금씩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인문학 융합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떠밀리거나, 하지 않으면 성공의 황금알을 갖지 못하거나 뒤처질 것 같다는 불안감에 쫓겨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인문학융합이 아니다. 새 상품생산에 쓰이는 단순한 장식적 교양이거나 소재를 얻기 위한 융합은 참되지도 않고 창의적이지도 않다. 인문학, 예술과의 융합의 중요성을 말하는 정부가 취업률을 잣대로 예술계, 인문계 대학교육을 저평가하고, 기업들이 인문, 예술계 전공자의 고용을 기피하면서 외치는 인문예술융합은 시류영합형 흉내내기일 뿐이다. 기술, 경영, 콘텐츠 부분이 인문학을 제대로 융합하기 위해서는 인문정신, 즉, 지배적인 사회질서나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질적인 것에 대한 개방된 감성과 상상력, 타자와의 공감, 다양성에 대한 존중의 정신을 함양해야 한다. 이럴 때에 인문학이 기술과학, 경영과 제대로 접속되며, 이럴 때에만이 아이폰같은 기술혁신, 윤리의료, 윤리경영, 소수자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도시설계, 조화로운 자연생태사업이 가능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유비쿼터스와 더불어 도래하고 있는 “지엔알 시대”(GNR: 생명공학, 나노, 로봇)에 걸 맞는 감성, 공감, 소통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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