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요즘 대학생들의 글쓰기 상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치르는 논술고사나 문예창작학과 등의 창작 실기고사의 답안지를 보거나, 대학신문의 기사, 학생들의 리포트 등을 접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떤 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전개하는 글쓰기인 논술의 경우, 수험생들은 출제자의 물음이 무엇인지, 글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장하는 바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 뒷받침하는 내용도 논리적 설득력은 극히 미흡하다. 
 
이런 학생들이 입학하여 제출하는 리포트는 어떻겠는가? 자신의 주체적인 문제의식으로 남다른 결론을 맺은 리포트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격이다. 장황한 내용을 나열하고 있지만, 내용과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교수가 요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하여 관련 내용을 수집하여 적당히 배열할 뿐이다. 수업을 통한 교수와 학생의 학문소통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다.
 
이는 대학신문 기자들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신문 기사를 기획할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미흡한 채, 취재부터 하고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에 대하여’ 써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머물러 있어 ‘~을(를)’ 기사화하겠다는 구체적인 기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취재 후, 원고를 작성하고나서 기사 타이틀을 놓고도 고심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 뚜렷한 생각이 없다보니, 기사 내용도 깊이 있게 문제를 파헤치지 못하고 표피적일 수밖에 없다. 
 
주제의 제약이 없는 창작 실기고사의 경우에도 주어진 글제에 대하여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실질적인 주제가 분명치 않고, 심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답안지를 만나보기 어렵다. 문예창작학과 입시 실기를 위한 학원, 개인교습이 성업중이라고 한다. 상투적으로 다듬어진 그럴 듯한 답안지들이 부쩍 많아진 것을 보면, 그 영향이라 생각된다. 충격적인 것은, 특정 유형의 글을 암기해와, 서로 다른 학생들의 답안지에서 단락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똑같은 글이 발견되기도 하였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일이다. 글을 통한 감동은커녕,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삶에 대한 일말의 생각이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평생 글쓰기를 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글마저 이 지경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글 한 편을 제대로 구성할 능력도 없이 대학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자신만의 절실한 경험을 가지지 못했고,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이나 현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뜻하는 바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환경을 우리 사회가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각적으로 느끼기를 좋아하는 영상세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생각하지 않는 속물 사회를 더욱 견고화하는 우리의 무신경, 무자각부터 갱신해야 할 것이다. 
 
이대로는, 자기 시대를 거스르고 미래를 내다보는 지성인으로 우리 대학생들이 성장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경쟁사회로 내몰기 전에,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변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물론(勿論)”이라는 말을 잊은 대학생이 될 수 있도록, 대학들의 고민과 노력이 절실하다. 그렇다고 책을 읽으라고 윽박지르지는 말자. 학생들이 읽어 온 책을 함께 펼치고 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독서 요구는 학생들에게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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