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명 본지 논설위원·숭실대 철학과 교수

사람들은 낡고 오래되고 헌 것을 한데 모아서 묶어 버리길 좋아하고, 이에 반해 새 것, 새로운 것을 발전과 진보로 치부하여 추구한다. 헌 것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낡고 성하지 아니한 물건’을 가리키며, 나아가 ‘현실에 뒤떨어진 보수적인 것이나 반동적인 것’을 뜻하기도 하고, ‘발전 과정에서 쇠퇴하여 사멸하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오래된 것을 낡은 것과 혼동하여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낡고 동시에 오래된 것이 있을 수 있겠으나, 모든 오래된 것이 다 낡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 것, 새로운 것을 지향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곧 오래되거나 또는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새로운 것은 낡아서 오래된 것이 되어간다. 양으로 치자면 대부분이 저절로 낡고 오래된 것이 되거니와 극히 일부만이 잠시 새로운 것일 뿐이다. 낡은 것, 오래된 것, 새로운 것의 구분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의존하게 된다.

영원히 새로운 것은 없다. 흔히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들 말한다. 계몽과 이성의 시대인 서구의 근대도 중세에 비해 좀 더 새롭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중세와 근대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거니와 어떤 부분은 이전 시대에 비해 비교적 새롭다는 이야기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다만 조금 더 새로울 뿐이다.

우리는 헌 옷을 낡지만 아주 편하게 잘 입고 다닌다. 새 옷은 남의 옷을 빌린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몸에 어색하고 어설프다. 광고 카피에 ‘헌 옷 같은 새 옷’이란 말이 있다. 새 옷을 팔기 위한 장삿속일 수도 있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판매 전략일 것이다. 우리 몸의 형편을 적절히 잘 지적한 표현이다.

헌 옷의 모양새를 약간 바꾸어 새 옷처럼 꾸며 맵시를 내는 경우도 흔하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다. 이른바, ‘폼나는 리폼’이다. 이 이치는 우리의 행동이나 사고, 가치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래된 행동이나 사고라 하더라도 현재에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를 버리기 보다는 새롭게 재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통의 ‘창신(創新)’이 아닐 수 없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이분법이나 이항대립이 늘 타당한 것은 아니다. 이 보다는 오히려 양자의 상생적 보완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생적 보완이야말로 지금 우리시대에 필요한 균형된 시각이다.

낡은 것을 고정관념으로, 또는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데 반해, 새로운 것은 변화를 지향한다고 가정한다. <논어>의 ‘위정편’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온고지신이란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일이다. 새로운 것은 오래되고 낡은 것과의 연관 속에서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다. 옛 것을 품을 줄 아는 자만이 새 것을 잉태할 수 있다.

요즈음의 세태를 보면 세대 간 혹은 신구 간에, 나아가 지역 혹은 계층 간에 소통이 지나치게 단절돼 있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재단으로 인한 불통과 갈등의 증폭은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인간성을 메마르게 한다. 유기적인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이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아마도 건전한 상식을 지닌 공동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는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레 형성되어 축적된 지혜의 산물이다.

현재는 과거를 담고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직관하며 미래를 예상한다. 오래된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 있거니와 미래의 밑거름이 된다. 미래는 새롭게 보일 뿐 이미 과거와 현재가 내장된 ‘오래된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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