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본지 논설위원·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말과 글이 수난을 받는 시대다. 입으로 한 말 때문에 입 주인이 감옥에 갇혔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허위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것이라지만 방송이랄 것도 없는 팟캐스트 ‘나꼼수’에서 거침없이 떠들고 까분 댓가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손으로 작성한 글로 인해 손가락 주인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황혼의 부엉이란 뜻을 가진 필명으로 경제문제의 핵심을 짚어내 각광을 받던 그였다.

뿐만 아니라 시대문제를 입 말로 혹은 손 글로 언급한 여러 사람들이 형사 법정에 불려 다니고 있다. 청산유수와 같은 말 재주를 가지고 온 백성을 배꼽잡게 만드는 개그맨들도 그 말 때문에 선량으로부터 고소당했다. 말과 글을 칼로 베어보려는 생게망게한 처사들이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시사잡지 <TIME>은 새 천년이 시작될 무렵, 지나간 천년동안 가장 위대한 인간의 발명품으로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을 꼽았다. 직지심체요절보다 100여년 앞선 금속활자 ‘증도가좌’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전해지지만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 제작된 우리나라의 직지다. 2001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보다 80여년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 활판술이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된 것은 그 기술의 확산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부패와 부정을 만천하에 드러내 사회를 변혁시키고 천부적인 존재로서 시민의 권리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활판인쇄술의 확산을 저지하려던 권력은 인쇄소의 허가제, 출판물의 검열제를 시행하고 유통을 억제할 목적으로 인지세라는 경제적 통제도 고안했다. 그러나 실패하였다. 말과 글을 통해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정보욕구를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사상의 자유경쟁시장’이라는 표현자유의 철학이 체계를 갖춰 수용되었다.

자유주의 시장의 가격 작동 원리와 마찬가지로 말과 글로 쏟아내는 갖가지 사상들의 유통기회를 보장해 주면 굳이 권력이 사전에 진위를 억지로 갈라보지 않더라도 사악한 허위는 진실한 주장들에 의해 퇴치될 것이라는 믿음체계다.

정치권력과 주류 언론은 스스로의 말과 글에 대해 사상의 자유시장론을 내세워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인터넷상의 표현에 대해선 허위를 척결할 수 있는 장치의 도입과 작동을 부르댄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한 사이버상의 모욕죄 신설 시도 등이 그러한 맥락에서 발만스레 읽힌다.

더불어 정치권력은 SNS가 가져 온 정보유통의 혁명성을 살천스레 눈감으려 하고 대신 ‘찌질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그 허위성을 과장되게 통박한다. 명예의 보호나 음란성의 폐해 등을 명분삼아 정부는 SNS와 앱을 심의하고 제재할 ‘뉴미디어 정보심의팀’을 신설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시각은 싸늘하다. 그러한 문제는 명예훼손죄 등 기존의 형사법이나 민사소송을 통해 충분히 대처 가능하기 때문에 인격권 운운은 씨알머리 없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몇 차례의 선거에서 확인된 SNS와 앱의 정보 혁명성에 놀란 정치권력의 허발한 몽니로 간주한다.

그마나 방송통신위원회가 2012년 업무보고를 통해 인터넷실명제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겠다고 밝힌 점이나 헌법재판소가 지난 12월 29일 SNS의 정치적 표현을 공직선거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위헌결정한 것은 때늦었으나 다행스럽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보다 십여년 앞서 우리나라에선 온 백성의 글인 한글이 창제되었다. 입의 말과 손의 글이 자연스레 조응하는 우주과학의 섭리가 담겼다. 백성을 어여삐 여긴 긍휼의 소산이다. 서양의 활판 인쇄술 발명보다 우리의 한글 창제가 더 위대하게 평가돼야 할 까닭이다. 말하고 싶으나 말 할 수 없는 말과 말 할 수 있으나 말하지 않는 말까지도 드레지게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한글이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새로 뽑는 큰 선거가 올해 열린다. 헛말과 빈말과 욕하는 말들이 왜바람처럼 선거판에 끼어들기도 하겠지만 정치권력은 자발없이 조부비며 말의 유통을 억지로 차단하고 처벌하려 나서면 안된다. 말은 칼로 베이지 않는다. 백성들의 말은 헛말조차 참말로 닦고 순화하면서 굽이굽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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