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교양학부 교수

우리의 몸은 딱딱한 사물이 아니다. 몸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변화한다. 식성, 직업, 취미, 사회 관습, 가치관에 따라 우리의 몸은 재구성된다. 따라서 ‘타고난 신체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자연미만을 찬양하고 인위적인 외모꾸미기를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자연미를 지지하는 것은 사람을 타고난 것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주장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연적인 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장, 옷, 가방, 구두, 머리, 손톱, 장신구, 향수, 보정 속옷, 다이어트, 피부 관리, 운동과 같은 외모꾸미기를 자기애와 근면함의 이름으로 찬양한다. 그렇다면 외모꾸미기의 또 다른 방법인 미용 성형 수술은 어떤가? 필자는 다른 글에서 과학사의 측면에서 미용 성형 수술이 외모꾸미기의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없음을 밝힌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미학의 관점에서 미용 성형 수술을 지지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미학의 관점에서 단서 조항을 달아 성형 수술을 지지한 바 있다. 단서 조항은 ‘미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가치를 탐색하는 미적 액티비즘의 수단으로 미용 성형 수술을 하는 경우’이다. 신체 예술가 올랑(Orlan)은 흥미롭고 다양한 삶을 위해 이마에 실리콘을 넣어 두 뿔을 만들었다. 3번의 수술은 미국과 프랑스의 미술관에 실시간 공계되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뿔난 여성의 모습으로 도전적이고 재미나게 살고 있다.   

물론 올랑의 성형 수술은 극단적 사례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가이든 일상인이든 성형 수술로 미적 주체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미적 인간으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기꺼이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외과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당당한 미적 액티비스트가 되어야 한다.

하려면 제대로 하자. 성형 수술로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인생을 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 경계 넘기의 미학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성형 수술로 장신도, 단신도 될 수 있다면, 조에족이, 마오이족, 우피 골드버그, 로버트 패틴슨의 외모로 살아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타자화의 경험은 그 자체로 신나는 도전일 뿐 아니라 다름과 다양성, 협력과 공존을 향한 사회적 가치 전환을 고민하게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의 미용 성형 열풍은 타자화, 차이, 다양성, 협력, 공존을 향한 미적 액티비즘이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의 미용 성형은 자아 탐구나 가치 전환과는 무관하다. 오직 성형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다. 탈락한 경쟁자는 재수술을 통해 재경쟁에 돌입한다. 결국 미용 성형은 모순적이게도 사람들의 외모를 획일화한다.   

무한 경쟁의 성형 수술과 획일화된 외모를 가진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사회는 미적으로 진보한 것일까? 개그맨 김원효는 “부드러운 인상”이나 “선한 인상”의 기준을 묻는다. 우리사회에서 미적 기준은 어차피 결정권자의 취향이다. 이 말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의심 따윈 접어두고 사회적 관행과 결정권자의 미학을 쫓으라는 뜻이다.   

필자는 미용 성형을 미학의 관점에서 지지할 단서 조항으로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가치를 탐색하는 미적 액티비즘을 제안했다. 소프트웨어로서의 몸은 얼굴과 몸매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모는 얼굴, 몸매의 형식적 속성 뿐 아니라 목소리, 어투, 표정, 자세, 제스츄어, 시선, 움직임, 매너, 표정, 분위기도 외모이다.

또한 외모는 가치관과 태도도 체현한다. 외모꾸미기는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라 자아 성찰과 실현이고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자 가치이다. 관행과 결정권자의 미학에 자신의 외모를 맞추려 힘들더라도 스스로 결정권자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은 어떤가? 멀고도 긴 인생, 자신의 미학으로 내 몸을 만들어보자. 미적 액티비스트에게는 미용 성형도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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