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태 목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이환태 목원대 교수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응용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분야의 정점에 도달하여 세계적인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들로부터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적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고 선진국의 젊은이들도 그것을 멀리하는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는 요즘, 이런 주장이 반갑기도 하지만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동서고금의 고전을 두루 읽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몇몇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읽어야 할 고전의 목록을 배포하여 읽게 하거나 적어도 그 맛이라도 보여주기 위해 여러 고전의 일부를 편집한 교과서를 만들어 교양과정의 교재로 사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가 생각해낸 최선의 것’임에 틀림이 없는 고전을 읽는 것은 만만찮은 도전이다.

이른 바 고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책들은 딱딱하고 어려워서 쉽게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런 책들은 몇 번씩 읽어야 비로소 그 의미하는 바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한 두 권도 아니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동서의 그 수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다. 어떤 책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현대적이라 할 만큼 투철한 ‘인생비평’을 쏟아내지만 어떤 고전은 하도 먼 시대의 산물이라서 우리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이런 걸 다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볼 수도 없다. 단지 교양만을 위해서 그 딱딱한 고전을 읽으라고 권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은 교양과 무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더 고약한 통치자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셰익스피어의 이아고 같은 인물은 오늘날 지성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지 슈타이너가 지적한 것처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태인 학살이라고 하는 만행은 바로 유럽에서 가장 교양의 수준이 높았던 독일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식이나 교양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녹아 있는 다양한 인간의 경험 때문이다. 고전 속에 녹아 있는 경험에는 실제의 경험도 있지만 상상력이 만들어낸 경험이 더 많다. 그걸 읽는 데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상상력이란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능력’인데,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과학적 발견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바로 이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해보지 않고서도 마치 그것을 해본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상상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보고가 곧 인문학의 고전이다.

살아가는 데 경험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이란 유한하기 짝이 없고 다양한 현실 경험을 쌓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그 현실 경험의 한계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것은 고전에 녹아 있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걸 읽음으로써 우리는 수십 수백 명의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현실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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