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명 본지 논설위원·숭실대 철학과 교수

[한국대학신문 한국대학신문 기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옛 시조 중에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구절이 있거니와, 또한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전자는 말로 인해 빚어진 우려와 분란해 대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목이요, 후자는 말이 인간의 정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인간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모두는 말이 지닌 힘과 가치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우리는 많고 적고 간에 매일 말을 하며 타자와 더불어 지내는 사회적 존재이다. 

근자의 정치사회적 상황에도 어김없이 막말 논란이나 파문이 들끓고 있다. 그야말로 말이 혼란스러운 사회이다. 말이 제값을 하는 사회가 바른 사회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설파했다. 말이란 말하는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며, 말 자체가 존재의 거처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을 사용하는 집단이나 사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말은 말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말하는 집단이나 사회의 ‘격(格)’을 그대로 나타낸다. 격이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분수와 품위를 과연 지키고 있는가.

말은 표현수단이요, 의사전달 곧 소통의 도구이다. 그런데 소통보다는 불통이 더 회자되는 세상이다. 불통은 폐쇄된 사회의 특징이다. 말이 제값을 못하고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특히 말로써 타인에 가한 중상이나 비방 따위로 받는 재난을 ‘설화(舌禍)’라 한다.

설화로 인한 패가망신의 예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실사회 속에서 수없이 보고 있다. 다른 이의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치부한다거나 본질을 왜곡한다거나 진실을 곡해하는 경우는 모두의 잘못이다.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그리하여 마음이 전달되는 말이 아쉬운 요즈음이다. 잘 전달하기 위해 때로는 수사나 은유와 같은 표현의 기교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어떤 표현의 기교보다도 진실됨의 전달이 가장 중요하다.

말이 미치는 힘에 대한 어떤 언론매체의 실험다큐의 결과가 매우 의미 있게 여겨져 여기에 간략히 소개한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말과 그렇지 못한 경우를 대비시켜 놓은 그야말로 ‘말의 힘 실험’이다. 밀폐된 용기에 적당량의 밥풀을 넣고 한 편은 좋은 말을 다른 편은 나쁜 말을 계속해서 약 4주간 지속적으로 행한다.

4주후에 양 쪽을 개봉해보니, 행복이나 고마움, 사랑함과 같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말을 한 편은 뽀얗고 구수한 누룩 내 나는 곰팡이가 피어 있고, 헐뜯고 증오에 찬 부정적인 말을 한 다른 편은 거무스레한 색의 악취가 나는 곰팡이가 피어 있는 실험결과에 대한 보고다.

실험의뢰를 받은 이도 놀랐고, 실험을 한 측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양한 언어 실험을 하여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를 얻으려고 말 속에 숨은 비밀을 파헤치려는 여러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결과는 분명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위(眞僞)’나 ‘선악(善惡)’, 그리고 ‘미추(美醜)’의 대비 관계에서 ‘진선미(眞善美)’야말로 자연의 질서에 합당하도록 인간에게 부여된 궁극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말의 영향력이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막말이나 폐륜적인 말은 그러한 행동을 잉태하고 있기에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생활 속의 광고문구나 간판, 정치인들의 말도 정제되지 않은 채 뱉어낸 거친 말이 지배적이다.

청소년들은 물론이려니와 어른들도 비어나 속어가 난무하는 말의 폭력 속에 일상을 살아가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은 인간다운 언어의 삶을 포기한 사회이다. 공동체를 선하게 이끌어가는 말이 화자와 청자 간에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말의 힘이 제값을 지니는 사회야말로 살만한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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