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본지 논설위원/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자. ‘달과 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외국의 우주왕복선이 서른 명의 우주인을 태우고 지구로 귀환하다가 사고를 냈다. 서울 한강에 추락해 우주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만약 이 사고에 이름을 붙여 보도한다면 어떤 명칭이 어울릴까. 우연히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서울 한강에 추락하였으므로 ‘한강 사고’라고 이름을 붙여도 괜찮을까. 아니면 ‘30명 사망 사고’라고 부르면 적절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달과 우주선 사고’라고 해야 맞을까.

다섯 해 전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이 원유를 쏟아낸 사고가 났었다. 항해를 마치고 정박해 있던 큰 배를 다른 배에 예인돼 가던 또 다른 배가 와서 부딪혀 엉겁결에 일어난 사고였다. 부딪혀 구멍이 뚫린 배는 홍콩 선적의 허베이스피리트 호였다. 해상크레인을 적재한 삼성 중공업의 ‘삼성-1호’가 구멍을 냈다. 언론은 그를 두고 ‘태안 기름유출 사고’라고 불렀다.

정박과 피항의 터전을 제공했던 태안 앞바다는 졸지에 시커먼 원유로 청정바다를 오염시켰다는 애먼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 바다의 신선한 수산물과 그 바다 근처의 청결한 땅에서 채취한 농산물들이 통째로 시장 소비자들로부터 오염 가능성을 의심받았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란 누명은 태안 사람들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겼다.

원유와 관련된 사건사고의 보도 관행에 따르면 유정사고는 사고의 지역이, 유조선 사고의 경우 해당 배의 이름을 붙여 보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례대로라면 다섯 해 전의 사고는 결코 ‘태안 기름유출’ 사고라고 불려서는 안됐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취재보도의 편이를 빌미로 언론은 너무 안이하고 쉽게 그 사고에 ‘태안’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게으른 언론의 위험한 작명법 때문에 수만의 선량한 사람들이 근거 없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심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몰염치한 언론은 여전히 그와 같은 방식의 언론보도에 대한 성찰의 시간들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며칠 전 교육과학기술부는 2013학년도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과 학자금 대출제한대학 명단을 발표했다. 전체 337개 평가대상 대학 중 43개 대학이 정부의 재정지원 제한대학에 포함됐고 13개 학교는 학자금 대출제한 대학에 선정됐다. 더불어 교과부는 22개 학교가 지난해 재정지원 제한 대학에 포함됐다가 지표 개선 노력을 통해 제한대학에서 벗어났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일제히, 그리고 간단없이 정부가 43개의 ‘부실대학’ 명단을 발표했다고 기사화했다. 문제가 있는 대학들을 하루빨리 정리하라며 압박의 고삐를 바투 죈 언론은 물론 낙인의 효과가 심대하기 때문에 더욱 엄정한 평가기준을 설정해야 한다는 언론까지도 서슴없이 마흔 세 개의 학교에 대해 ‘부실대학’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교과부는 정부의 재정지원 제한대학과 학자금 대출제한대학을 발표 한 뒤에 학자금 대출제한대학을 중심으로 현장 실사를 거쳐 12월에 ‘경영부실대학’을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경영이 부실한’ 대학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진 학교를 ‘경영부실대학’이라고 언론이 보도하는 것까지야 문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흔 세 개의 재정지원 대학과 13개의 학자금 대출제한대학을 깡그리 ‘부실대학’이라고 이름 붙여 보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기름유출 사고의 당사자들인 배와 배들의 이름을 붙여 보도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순박한 피해자일 뿐인 ‘태안’을 사고의 주범으로 형질변경한 당시의 언론보도와 다를 바 없다.

‘부실대학’으로 낙인찍힌 대학의 교직원, 학생, 학부모는 물론 심지어 오래 전 졸업생과 그 졸업생의 학부모까지 ‘부실대학’의 당사자로 찍혀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소리죽여 감당하고 있다. 이 나라 이 땅 어디에도 부실한 대학생과 부실한 학부모는 없다. 비싼 등록금을 거두어 부실하게 관리한 부실한 경영진, 학생들 교육 및 행정지원에 부실한 대학 당국의 보직자들이 짊어져야 할 멍에를 애꿎은 피해자들이 다시 감당하는 꼴이 되었다. 언론의 부실보도를 먼저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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