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

▲ 이덕환 서강대 교수
대선이 다가오면서 또다시 정부의 행정체제 개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뀌면 인수위를 통해 행정조직을 개편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행정학자들의 어설픈 주장에 따라 행정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과학기술이 소외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 과학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 과학기술이 국정의 중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탓이다. 과학자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고, 지지부진하던 출연연 개편도 연구 현장만 흔들어놓고 무산돼 버렸다. 심지어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까지 과학계를 괴롭히고 있다. 느닷없이 ‘네이처’에 우리가 창조론자의 요구에 굴복했다는 기사가 실리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단순히 예산만 쏟아 붓는다고 창조형 연구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새 정부에서는 반드시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다시 세워야 한다. 정부의 거의 모든 부처와 지자체로 확산돼 버린 국가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종합적인 기획·조정 기능을 강화하고, 과학기술 전담부처를 신설해야 한다.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목적과 취지가 분명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예산 확보 수단으로 활용하는 부처와 지자체가 적지 않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우선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종합조정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 현재의 장관급 위원장으로는 국과위의 정상적 운영이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직접 국과위를 관리할 수 없다면 확실한 대안을 찾아내 국과위가 거시경제적 맥락에서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예산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학기술 전담 부서의 부활을 위해서는 초중등 교육, 직업·평생 교육과 대학입시 기능은 분명하게 분리시켜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초중등 교육을 지자체로 이관하는 방안을 다시 고민하거나 작은 교육부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과 같은 거대 조직으로는 학생과 학부모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기술 전담 부서의 몇 가지 형태로 생각해볼 수 있다. 기초과학과 거대과학, 기상·표준, 지적재산권 업무는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다. 여기에 정보통신 관련 업무를 추가하여 ‘과학기술통신부’를 만들 수 있다. 분명한 명분도 없이 폐지되어 버린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를 부활하는 의미를 살릴 수 있다.

과학기술 인프라 구축, 대학의 연구개발, 출연연 관리, 융합연구 업무를 포함시켜서 ‘고등과학부’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경우에는 산업 기술 관련 업무를 과감하게 민간에게 넘기고, 정부는 미래를 위한 기초연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긴다. 산업기술과 정보통신, 고등 교육, 특허, 그리고 국과위의 기획·조정·평가, 성과관리 업무까지 함께 묶어서 부총리급의 ‘과학기술혁신부’를 만들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국과위의 기능 조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물론 행정체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도적 뒷받침이 없으면 과학기술이 국정의 중심에 설 수 없다. 만약 과학기술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가 요구하는 경제력을 확보하고,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원만한 사회적 합의 능력을 갖추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과연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행정체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공개적이고 진지한 공론의 과정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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