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수능은 틀리지않기 훈련… 창의력 측정 못해”

최근 전국자연과학대학장협의회는 지난 2~3월 전국 20개 대학의 2007학년도 이공계 신입생 976명을 상대로 치른 수학시험 결과를 공개했다. 중·고 교과서 수준의 주관식 문제였으나, 결과는 100점 만점에 평균 점수가 48.8점으로 참담한 수준이었다. 오세정(吳世正·54) 협의회 회장(서울대 자연대학장)은 13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수학·과학 교육의 위기는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때마침 김신일(金信一) 교육부총리는 “대학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져 민족적 수치를 느낀다”며, 대학은 입시제도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비판한 날이었다. 오 회장은 이런 김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교육부”라고 반박했다. 현행 입시제도와 고교 교과과정에 대한 과학계의 우려를 들어 보았다. ―이공계 대학 신입생의 수학 실력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서울대의 경우 과거 실력 수준인 신입생은 3분의 1 정도뿐이다. 학생들 사이의 격차도 크다. ‘물리2’를 배우지 않고 물리학과에 들어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들도 있어서 수준 별로 따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어떤 대학은 중·고등학교 과정을 만들어 아예 다시 가르친다고 들었다.” ―OECD국가의 국제학업성취도비교(PISA)에서 우리나라 수학·과학 성적은 높은데, 왜 대학 신입생 수학성적은 형편없는 것인가. “그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해봤다. 이번에 전국자연과학대학장협의회가 낸 수학문제는 문제풀이 과정과 답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수능 같은 객관식 문제만 접해온 아이들은 그걸 못했다. 한국 고교생의 학업성취도가 높다고 해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들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한국 아이들이 수학·과학을 좋아하거나 이해가 깊은 것도 아닌데도 성적이 뛰어난 것은 학원 교육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일정 수준의 문제까지만 풀어 보고는 더 깊게 공부하기보다 그때부터 틀리지 않는 연습만 반복한다.” ―왜 최근의 신입생들 학력이 더 떨어지는 것인가. “옛날 본고사 수학은 5~6문제가 출제됐다. 문제 하나도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풀 수 있었다. 지금 수능은 수학공식에서 두 단계 이상 거치는 문제, 즉 깊이 있게 응용하는 문제는 안 나온다. 실력 좋은 교사도 그 이상은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틀리지 않기 훈련 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실력은 옛날만 못해졌다.” ―쉽게 출제되는 수능이 고교 교육의 학력저하를 가져 온 것인가. “지금 수능은 모든 교과서가 다룬 내용이 아니면 출제가 힘들다. 선진국의 교육과정은 ‘이러저러한 내용이 포함되면 그 이상은 알아서 가르치라’는 식이다. 반면 우리는 교육부가 ‘이러이러한 범위 내에서 출제하라’고 하면 그것이 ‘맥시멈’(maximum ·최대한)이 되고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다양성이 없고 획일적인 문제가 출제되고 있다. 그것이 수능의 가장 큰 문제다.” ―대학 이공계의 학력저하가 왜 그리 심각한 문제인가. “21세기는 창의력을 가지고 먹고살아야 하는 지식기반 사회이다.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면 과학기술자들의 기본 능력이 필수적인데, 그 기본이 무너지고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오늘날 군사, 금융은 물론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수학은 결정적이다. 삼성전자가 잘하고 있지만 그것은 생산기술이 좋다는 의미이다. 생산기술은 출발이 늦어도 따라잡을 수 있으나, 지식기반사회에서 중요해지는 분야들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 지도층들은 ‘미국의 번영은 엔지니어의 성공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도 최근 미국 학생들이 수학·과학 공부를 게을리한다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국은 인재를 수입해서 써 먹을 수 있는 나라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는 나라이니 위기의 정도가 미국보다 휠씬 더 심각할 수 있다.” ―최근 교과과정 개편 과정에서 과학기술계가 수학·과학 과목과 기술의 분리를 요구했지만 반영이 안 됐는데…. “교육개혁을 진행 중인 일본은 ‘21세기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교과과정 개편을 맞추는데, 우리는 거꾸로다. 과목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것이 더 큰 일이 됐고, 목소리가 작은 과목은 불리해졌다. 과거 정부는 과학계를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고교 교육과정이 뭔지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다른 이해 그룹들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 “중요한 과목에 대해서는 수업시간을 분명히 보장해 주고, 현재의 상대평가제는 바꿔야 한다. 상대평가는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듣는 과목을 학생들이 기피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물리2’를 듣고 싶어도 잘하는 친구들과 경쟁하기 싫어서 쉬운 과목으로 가는 현상은 막아야 한다.” ―김신일 교육부총리가 ‘국내 대학들의 국제경쟁력 수준이 떨어져서 민족적 수치를 느낀다’고 말했는데…. “지나친 말이다. 선진국만큼 투자를 하고 그런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대학은 다양하게 학생들을 뽑고, 또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들도 교육시키려 한다. 하지만 교육부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조금만 제도를 바꾸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학력은 떨어지는 아이들이 줄어 들 텐데….” ―우리 기업들이 해야 하는 역할은? “우리 기업들은 대학 연구에는 신경을 좀 쓰지만 중·고교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기업이 교사 재교육을 도와주면 교실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대학생들이 자격증 분야로 몰려가고 있는데…. “20~30년 뒤의 상황을 예측하면 의사나 한의사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우리도 머지않아 빌 게이츠 같은 기업인을 배출할 것이고, 과학계의 위상도 올라가게 돼 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연구가 많이 진행 중이고, 희망과 가능성이 충분하다.” ―미국 대학처럼 서울대도 한국의 ‘먹거리’ 창출에 기여해야 하지 않겠는가. “10년 전에는 남이 하는 것을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이제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0년 뒤면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할 것이다. 물리학과 생물학을 결합해서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미국에서도 인기를 끄는 분야인데, 이 중 몇 가지 연구는 한국도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우리가 산업화 하기 시작하면 바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수백만 달러를 버는 교수들도 나오고 있는데…. “변화는 더디지만 조금 더 인센티브를 주고 채찍질하면 백만장자 공대 교수가 나올 것이다. 이미 몇 명 있다. 그런 ‘모델’들이 나와야 학생들에게 ‘이공계의 꿈’을 심어 줄 수 있다.” 오세정 회장은=고체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로 꼽힌다. 1971년 경기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제록스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84년부터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4년 12월 자연대 학장을 맡았으며 현재 연임 중이다.(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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