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민주화선언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졸업정원제

[한국대학신문 특별취재팀] 창간 24주년 특별기획으로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와 공동으로 ‘뉴스로 본 대학 30년’을 연재한다. 5공화국부터 현 MB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학정책을 중심으로 그간의 변화와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지난 30년간의 대학관련 10대 뉴스를 선정한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대교협 200여개 회원교의 총장을 비롯, 교수, 직원 등 대학 구성원 2019명이 온오프라인 조사를 통해 9월 19일부터 28일까지 직접 뉴스에 순위를 매겼다. 첫 회 30년을 아우르는 10대 뉴스에 이어 이번호부터는 대학 구성원이 뽑은 우선 순위에 따라 각 정부별 5대 뉴스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 5공화국 ◆

1위   6.29 민주화선언(1987년 6월 29일)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국민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1985년 2·12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도덕성·정통성 결여와 비민주성을 비판하며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이에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며 정국은 대결 국면으로 치달았다.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하루 전인 9일 연세대 이한열이 시위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면서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여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결국 이한열은 사망한다.

시위가 거듭되고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정부는 한때 군 투입을 검토했으나 결국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6·29 민주화선언이 발표됐다.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2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 14일) 

▲출처:e-영상역사관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건국대 점거농성사건 이후 5공화국 정권은 저항세력의 발본색원을 강조하며 대대적 검거에 나선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학생을 불법 체포했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박종철을 고문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다. 같은 달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부검인 황적준 박사가 사인을 ‘쇼크사’가 아닌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부검소견서를 작성했고 언론들은 일제히 물고문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결국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이 구속됐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해 1987년 6월 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됐다.

한편 당시 박종철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10.26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3위  졸업정원제 채택(1981년)

1970년대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사교육(과외) 과열, 재수생 누적, 인성 교육 부재, 대학의 안일한 학문풍토, 타성적 학사관리 등의 병폐가 커지자 이같은 문제들을 해소하고 대학 문호 개방과 면학풍토 정착을 위해 졸업정원제가 채택됐다.

그러나 취지와는 달리 운영과정에서 적지않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 선진국의 경우 대학들은 자율적으로 학업을 등한시하는 학생들을 가려내는 데 비해 한국은 국가 방침에 따라 일률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점, 둘째 초과 모집인원을 일정 비율에 따라 탈락시키는 것은 각 대학의 특성을 고려치 않은 경직된 제도운영이라는 점, 셋째 중도에 수료 학생들 중에는 입학 성적이 비교적 좋은 학생도 포함돼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중도수료자가 다시 진학 · 편입학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 등 문제들이 하나둘씩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같은 문제제기에 따라 1983년 8월 대학이 융통성 있게 운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졸업정원제를 개선했다. 하지만 졸업정원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해소되지 못하면서 1990년(의학 ·치의학 ·한의학과는 1992년) 졸업자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4위  학원, 과외 등 사교육 금지령(1981년부터)

1980년 7월 30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한 7.30교육개혁조치에 따라 재학생의 과외 교습 및 입시 목적의 학원 수강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다. 대학입시 과열로 고교생의 과외가 성행하자 1980년대 이후 정부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고 법적으로 과외 금지 조치가 시행된 것이다.

국보위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으로 교육개혁 조치를 단행한다. 7.30교육개혁은 당시 우리 사회의 큰 병폐로 문제시 되고 있던 과열 과외는 물론 교육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로 △대학 본고사 폐지와 고교 내신 성적 확대 △졸업정원제 실시와 대학입학 인원의 대폭 증원 △대학의 주야간 구분제도의 폐지 등을 골자로 했다. 

과열 과외 추방을 위해 직접적으로 △사설학원의 학생출입엄금 △위반학원은 인가 취소 △과외교사 등록 의무화 △소득의 세금징수 등 범국민운동 전개방안도 제시했다. 국보위는 모두 151개의 법을 국회를 대신해 제정 공포했며 당시 그중 하나로 공포된 법률이 과외금지였다.

그러나 이후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에서 과외 교습 단속 행위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려 무효화된다.

5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교육개혁심의회’ 설치 및 교육개혁안 마련(1985년 3월)

▲ 출처:e-영상역사관
교육개혁심의회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간 설치됐던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다. 주로 주요 교육정책과제에 관한 연구와 심의를 하고 이를 종합해 교육개혁방안을 제시하며, 관계부처와 협의해 교육개혁을 위한 사회 경제적 측면의 지원대책안을 수립·제시했다.

교육개혁심의회는 미래의 전망과 우리 교육현상에 비추어 21세기를 주도할 한국인상을 ‘자주적, 창조적, 도덕적 인간’으로 정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10대 교육개혁안을 수립한다. △학제 개편 △입시제도 개혁 △학교시설 현대화 △우수 교원 확보 △교육내용과 교육방법 쇄신 △과학두뇌 개발 △대학교육 수월성 추구 △평생교육체제 확립 △교육행정 자율화 △교육투자의 획기적 증대가 그 내용이다.

교육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성과를 거두기 위해 정부 실무국장급으로 교육개혁 대책 실무협의회를 구성하고, 국민의식 및 사회·환경 부문, 고용 및 임금부문, 교육재원 부문에서 각 부처별로 교육개혁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부처 간에 협의를 진행했다.

<특별취재팀=윤지은 부국장, 신하영 부장, 민현희·이용재·이현진·이재·손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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