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직선제'‥ 학내 민주화 시동, '사학법 개정'‥ 재단권한 비대화

[한국대학신문 특별취재팀] 창간 24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와 공동으로 ‘뉴스로 본 대학 30년’을 연재한다. 5공화국부터 현 MB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학정책을 중심으로 그간의 변화와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지난 30년간의 대학관련 10대 뉴스를 선정한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대교협 200여개 회원교의 총장을 비롯, 교수, 직원 등 대학 구성원 2019명이 온오프라인 조사를 통해 9월 19일부터 28일까지 직접 뉴스에 순위를 매겼다. 첫 회 대학가 10대 뉴스에 이어 지난호부터 대학 구성원이 뽑은 우선 순위에 따라 각 정부별  5대 뉴스를 소개하고 있다. <편집자 주>

◆ 6공화국 ◆

1위. 총장직선제 실시(1987년)

1987년 목포대를 시작으로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기운을 타고 교수협의회가 결성돼 직선제로 총장을 선출하는 대학이 늘게 된다. 학내 민주화 실현과 사학 재단의 전횡을 막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이 제도는 구성원들에게 환영받았다. 재단 이사회가 일방적으로 총장을 선임해 학교의 전체 운영을 좌지우지하면서 발생됐던 각종 재정이나 인사비리, 구성원간 소통 부재 등의 문제들로 인해 학내 분규를 유발하며 정상적인 교육 운영이 어려웠다는 점에서 총장직선제의 도입은 대통령 직선제만큼이나 학내민주화를 염원하던 구성원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된 후에도 학내 갈등은 계속 됐다. 선거과열로 인한 후유증, 교수사회 파벌 조장, 총장의 인기영합적인 행정 등의 부작용으로 인해 총장직선제의 문제점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직선제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문제가 가시화되던 무렵이다. 일부에서는 직선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교수협의회와의 논의없이 이사회가 총장을 선출해버리는 직선제 이전의 행태가 다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학내 구성원들이 이사회의 독단이나 정실인사, 비민주적인 의사소통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대학에서 특히 그랬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직선제 유지와 폐지의 입장이 서로 엇갈리게 된다.

2위 교육개혁위원회 개혁안, 사립학교법 개정 ‘재단 권한 비대화’ 논란 (1990년 3월)

1990년 3월 16일 임시국회에서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사학에 대한 행정감독권을 축소해 사학의 자율성을 신장한다는 명분 아래 재단에게 교원임면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같은 사립학교법의 내용이 교육계에 알려지면서 재단의 권한을 지나치게 비대화시킨 개악이라는 비난여론이 빗발쳤다.

개정 법률은 재단 이사장 친인척의 총∙학장취임 금지 규정 등이 삭제되고 총∙학장이 갖고 있던 대학 교수∙직원 임면권을 학교법인에 넘겨줘 재단이 교원 신분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한 학교법인의 이사장은 다른 학교법인의 이사장을 겸할 수 없도록 돼있었으나 겸직할 수 있도록 바꾸었고, 학교법인의 기본재산을 임대할 때는 관할청(문교부 교위)의 허가를 받도록 했으나 허가절차를 없애버렸다.

더욱이 교육법∙교육공무원법 등 다른 교육 관계법의 처리를 늦추면서 사립학교 개정안만을 충분한 의견수렴절차도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전격 처리함에 따라 여론은 악화됐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와 전교조 등 평교수, 평교사 단체들은 “재단이사장이 학교 운영에서 전횡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었
으며 교원의 신분을 극도로 위태롭게 하는 법률”이라며 민주적 개정을 요구했다.

3위 사립대 57명 교수 강제해직 등 교권침해 논란 (1991년 4월)

▲출처: 전국대학교수노조 <※상기 이미지는 관련사진으로 특정 교수 복직과는 상관없습니다.>
유신시대와 5공 당시 정부시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거나 사회와 학원 민주화에 앞장섰던 사립대 교수들 57명이 강제 해직되고, 탄압의 도구로 사용된 교수 재임용제도에 의해 교수들이 대거 재임용에 탈락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교육계에서는‘교권침해’라며 강력 반발했다. 1990년 3월 사립학교법 개정 통과 발효로 교수의 재임용 기간을 재단에 일임하게 되자 그전까지 2년이었던 전임강사의 재임용기간을 6개월로 단축, 매 학기마다 재임용심사라는 ‘무기’로 교수들에 대한 교권 침해는 물론 해당 교수와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졌다.

해직 교수가 급증하자 사립학교 관련법에 재임용 절차 방법 등 구체적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아 연구업적평가 같은 객관적 요소보다 재단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재임용이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재단의 눈밖에 난 교수들이 재임용과정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의 해직 사유는 교수재임용탈락, 해임, 직위해제, 파면, 강제사직 등이었다. 

4위 전교조 교육정책 반대 시국선언 (1991년 5월)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시위를 진압하던 일명 ‘백골단’의 구타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에서 쇠파이프 등 둔기에 의해 찢겨진 상처가 발견됐다. 이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 911명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강 군 등의 죽음은 강압통치에서 나온 필연적인 산물인데도 정부당국이 제도적인 개선도 없이 내무장관 경질 등으로 무마하는 움직임에 대해 우려와 분노를 느끼며 현직교사로서 제도적 폭력으로 통치하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교조는 선언문을 통해 △노태우 내각 총사퇴 △백골단과 전경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를 포함한 7개 조항을 내걸었다.

교육부는 서명 교사들에 강경대응했다. 그럼에도 불구 5월 8일까지 2821명이 서명을 마쳤다. 정부의 저지에도 서명운동이 확산되자 교육부는 징계로 방침을 선회했다. 교육부는 “교사들의 서명활동은 국가공무원법 제65조의 공무원집단행위 금지조항 등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교육부의 강경방침이 이어졌으나 전교조는 정치 사회적 활동을 늦추지 않았다. 1999년 합법화 기구로 승인됐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5위 대학 학사 제적(除籍) 부활 (1991년 6월)

6월 민중항쟁의 여파로 폐지됐던 대학의 학사제적 제도가 부활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지역 주요 대학들은 1991년 6월 5일 전국 63개 대학 총∙학장회의에서 면학 풍토 조성을 위해 학내 쇄신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6월 민중항쟁 이후 대학들은 자율화의 물결 속에 학사경고와 학사제적 등 규제학칙을 철폐했고 총장이 직접 징계를 내릴 수 있도록 한 조항도 폐지됐다. 사실상 학내에서 학생들의 행동을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사라진 셈이다. 이러한 대학 자율화 계획이 대학 본연의 교육적 위상을 위협하는 상황에 처하자 다시 학사제도의 규제 조항을 도입하게 됐다.

교육부와 각 대학은 현행 학칙이 △성적 불량자에 대한 제재 조치 완화로 면학분위기가 흐려지고 △성적불량자 징계 규정 삭제로 대학의 질적 향상이 어렵게 됐으며 △출∙결석 상황 미반영으로 결석이 잦아도 처벌이 곤란하고 △총∙학장 직권 징계 조항 삭제로 문제 학생에 대한 징계가 사실상 힘들게 돼 있으며 △학생회 및 학생단체의 운영에 관한 규정미비로 학생지도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학사제적제도 부활의 배경을 설명했다.

<특별취재팀=윤지은 부국장, 신하영 부장, 민현희·이용재·이현진·이재·손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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