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훈 강원대 인문사회대학 교양과정 교수

고기가 참 흔한 세상이 되었다. 무슨 모임을 하면 으레 고깃집이다. 길거리에 패스트푸드점이나 치킨집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만 원 정도면 국민 간식이라 할 만한 치킨을 한 마리 먹을 수 있고, 고기 패티가 들어 있는 햄버거는 그보다 훨씬 싼값에 먹을 수 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고기는 이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가끔 먹어도 국에나 들어 있었지 구이로 먹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싼 닭고기가 ‘영양’을 제공하는 구실을 했다.

고기를 이렇게 싸게 먹을 수 있게 된 데에는 가축을 대량으로 사육하게 된 까닭이 가장 크다. 기껏해야 몇 마리씩 농가에서 기르던 방식에서 수백, 수천 마리씩 사육하게 됨에 따라 우리는 싼 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싼 가격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이른바 공장식 사육은 동물을 사료라는 재료를 가지고 고기라는 생산품을 출하하는 기계로 간주할 뿐, 기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닭을 예로 들어 보면, 예전에는 마당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모래를 쪼거나 지붕에도 올라가던 닭이 이제는 고작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평생(치킨으로 출하되는 닭은 그래 봐야 한 달)을 살아야 한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지는 쉽지 않은 주제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한다. 왜 그럴까? 나도 고통을 받으면 싫어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고통을 받으면 싫어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러면 고통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잘못이지 않을까? 고통을 받으면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고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괜찮을까? 인간은 동물보다 분명히 지능이 높다. 그러나 지능이 낮다고 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면, 똑 같은 이유로 고통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동물에게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육식을 하더라도 동물에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사육한 후 도살을 했기 때문에, 동물이 느끼는 고통은 도살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뿐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육식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데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의 육식 문화는 육식이 윤리적이지 못함을 더 심각하게 알려 준다.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동물은 도살뿐만 아니라 사육 과정에서 고통을 견디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살의 고통은 그 순간만 견디면 된다고 하더라도 사육의 고통은 평생을 지속되므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닭의 고통을 짐작하려면, 열 명 정원의 엘리베이터에서 열 명이 가득 탄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도살도 예전보다 더 잔인해졌다. 백정에 의해 최대한 경건하게 이루어지던 것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탓에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동물에게 고통을 동반하는 도살을 거쳐야 하므로, 육식 그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육식 자체를 그만 둘 수 없다면, 사육 과정에서의 고통이라도 줄이는 방식으로 고기를 섭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고기가 흔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아주 가끔, 무슨 날에만 고기를 즐기는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을 받지 않으려는 동물에게 여전히 고통을 주는 데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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