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도약 위한 또한번의 기적 기대

[한국대학신문 김기중 기자] ‘모든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아동 수가 50%를 넘고 있다. 길고 긴 하루를 낮에는 학교에서 주는 빵 한 조각으로, 저녁은 물오른 겨릅대 껍질로 때우는 소녀의 얼굴빛은 누렇게 떠 있다. 소녀는 빵 한 조각을 속옷에 밀어넣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경향신문 1964년 5월 19일자)’

■ 70년대 고속성장한 한국=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는 급감했다. 원조에 기반을 뒀던 남한 경제도 뿌리째 흔들렸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본격화된 경제 위기는 장면 시대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초반에도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상공부 자료에 따르면, 1964년 1월 당시 국내에는 모두 7881개의 생산공장이 있었다. 이 중 전체의 36%인 1924개가 휴업 중이었다. 중소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1만9689명과 중소광산노동자 1만6643명은 해고당한 채 거리로 내몰렸다. 농업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특히, 1962년 대대적 흉작이 발생, 농가경제는 파탄을 맞았다.

이렇듯 1960년대 중반까지 파국으로 치닫던 한국경제는 1970년대부터 고속성장을 거듭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낸 <한국경제의 성장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 우리나라 경상가격 GDP는 2.8조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2011년에는 1237조원을 기록, 무려 446배나 증가했다. 1970년부터 40년 간 연평균 실질성장률은 7.2%였다. 특히, 시기별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각각 9.0%와 9.7%를 기록했다. 세계대전 후 패망했던 독일의 고속성장을 가리키는 ‘라인강의 기적’이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1970년대부터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승승장구 했다.

■ 개발도상기 경제정책의 양면=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고속 성장과 관련해 수많은 요인들이 거론된다. 일차적으로는 공급 측면, 즉 생산에 투입된 노동력과 자본의 증가 및 생산기술의 진보를 들 수 있다.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요인 또한 경제성장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을 우선 요인으로 꼽는다. 조 교수는 “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적절한 설계’와 ‘유능한 시공’으로 우리 국민의 잠재력을 엮어내 당시 사회지표가 예측해 주던 성장률보다 더 높은 성장을 실현해냈다”고 말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한 핵심적 역할에 대해서는 ‘기획조정(coordination)’을 들었다. 이를 통해 당시 예견된 시장의 실패를 극복했다는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은 ‘냉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얻어낸 해외 차관으로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지금 한국경제의 상당수 문제들을 불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지난해 열었던 ‘5·16 군사정부의 정책 구상과 실제’ 세미나에서 이현진 국민대 교수는 이를 두고 “민간정부 이양을 앞두고 파트너나 물적 기반이 필요했던 군사정부의 조급함이 대자본가의 역할을 중요하게 만들었다”며 박정희 정권이 지금의 불균형적 재벌 주도형 경제의 시발점이라고 진단했다.

■ 국가 인프라가 성장 밑천= 해외 차관을 밑바탕에 깔고 보릿고개 해결을 국정철학으로 삼은 박정희 정권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내건 첫해 성장률 목표는 7.1%. 모두 220개나 되는 사업이 한꺼번에 시작됐다. 세계은행에선 “돈도 없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업을 할 거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1차년도인 1962년의 성장률은 2.2%에 그쳤다.

하지만 1964년 경제정책 무게중심을 ‘수출’로 옮기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시멘트·비료·정유·철강 등 다른 산업의 바탕이 되는 공장들이 세워졌다. 이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났고, 국민들은 굶주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이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1970년대 공업화에 따라 철도·고속 도로·항구·통신시설 등 국가 인프라가 건설됐다. 중공업 이후 이어진 경공업 제품 수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포항제철과 중화학 공업 단지 건설로 한국은 공업국으로 변화했다. 여기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돼 농촌 경제도 살아났다. 고속도로와 중공업 등 국가 차원 인프라와 함께 해외 차관, 독재에 따른 강력한 재정·금융 정책들이 투입됐다. 이에 따라 수출산업이 급성장,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러한 토대 위에, 한국은 1980년대에 이르러 공업국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 수출상품은 전자제품·자동차·기계·철강 등 중화학 공업 제품이었다. 쌀의 자급 자족으로 배고픔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1인당 국민 소득도 5000달러를 넘었다.

■ '제2 한강의 기적' 내건 박근혜정부= 물론, 고속 성장에 따르는 부작용도 상당했다. 고속 성장은 다른 말로 ‘압축’된 성장이다. 선진국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한 것들을 너무도 빨리 건너 뛰었기에 문제점도 많다는 분석이다.

빈부의 격차, 재벌밀어주기에 따른 기업 구조 불균형, 경제성장 최우선 정책에 따른 정치·사회 미성숙, 도시인구 과밀화와 농촌인력 부족, 환경오염 등은 성장의 그늘이다. 박정희 정권이 지금의 한국경제 성장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문제점의 핵심 역시 사실상 박정희 정권이다.

그렇다면 새로 정권을 잡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잔재들을 넘을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내건 공약에서부터 창조경제를 강조했고,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강조하며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KDI <한국 경제의 성장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한국 경제 전망은 그다지 밝지 못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불황속에서도  국가신용도가 상승하고 성장동력을 유지해온 만큼 향후 경제규모는 확대되고 한국경제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발맞춰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미래 먹거리 창조를 내건 박근혜 대통령의 ‘제2 한강의 기적’을 이루자는 목표와 염원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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