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 삶과 인생(7)유통과 제조의 水平化-초당약품 창립과 제약 활동

나는 평생 약업인으로서 살아오면서 가끔 유한양행 창업주인 고(故) 유일한(柳一韓) 박사가 남긴 일화를 떠올리곤 한다. 올해로 42주기를 맞은 유 박사는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제약기업인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유 박사는 유한양행을 창업할 때 같이 힘썼던 직원이 만주 출장을 다녀온 뒤 “우리도 만주에서 마약을 취급하면 큰 돈벌이를 할 수 있겠다”는 보고를 하자 일어서서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임자! 자네가 나한테서 배운 것이 그것뿐이야?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제약회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 제약회사를 만든 것이야. 당장 내 앞에서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정부 당국이 제약협회에 약값을 인하하겠다고 통보하자 제약회사 대표들이 회동해서 “그렇다면 우리도 ‘약의 함량’을 낮추겠다”고 결의한 뒤 이 같은 사실을 유한양행에 통보했다.

이에 유일한 박사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돈을 벌겠다는 말이냐? 유한양행은 제약회사의 간판을 떼어낼망정 그 일에 동참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는 존엄하고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책임지는 제약회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반드시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의약인들의 제약 신조(信條)이자 덕목(德目)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64년 목포에서 다른 사람이 경영하던 삼초제약을 인수했었다. 당시 확장된 사세와 자본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가운데 약품 제조업으로의 진출과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는 명실상부한 의약업체로 도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약품 제조업에 참여한 것은 제약회사들의 직거래(直去來)로 말미암아 도매업계가 위협을 받는 데 따른 일종의 자구책(自救策)이었다.

나는 삼초제약을 인수하면서 당시 창궐하던 디스토마 치료제인 에메친 주사와 쥐약인 살서제 생산을 준비하고 있었고, 관리하기 편리한 목포에 공장을 신설했다. 공장을 가동하고 생산에 들어갔으나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는 바람에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가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일종의 ‘작전상 후퇴’라고나 할까. 당시로서는 시대적 상황에 밀려 제약사업 진출을 포기했으나 “때가 되면 언젠가 다시…”하면서 제약업 재진출을 다짐하고 있었다.

‘나의 인생철학은 한마디로 ‘생명존중(生命尊重)’ ‘약업보국(藥業報國)’이라고 할 수 있어. 이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유통회사인 백제약품과 더불어 쌍두마차(雙頭馬車) 체제인 제약회사 설립이 꼭 필요해. 아무렴 그렇고말고….’

이렇게 여러 차례 각오를 다지던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나는 백제약품의 자매회사로 1982년 4월 16일 서울에서 내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 초당약품공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초당약품은 해외 유명 제약회사와 기술을 제휴, 양약은 물론 동양인 체질에 적합한 생약(生藥)의 새로운 기술도입과 신제품 개발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국내 우수 연구기관과 협력해 신물질 개발에 적극 참여하는 등 질 좋은 우수 의약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초당약품이 성공적인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제품개발에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소염진통제인 ‘바이겔’, 간장치료제 ‘헤파알봄’, 혈액순환촉진제 ‘두리방’ 등이 연달아 소비자로부터 호평을 받고 판매량이 급증했다.

또한 기존 제약회사와는 현격히 다른 경영방식이 초당약품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라이벌 경쟁업체조차 “기존 제약회사는 매입채무와 매출채권의 회전율이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어 기업활동이 저조했었다”면서 “반면 초당약품은 판매비와 일반관리비에 집중하는 낡은 경영방식을 지양, 매출채권의 회전율을 높이는 등 선진적인 경영방식을 채택했다”고 성장의 비결을 평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초당약품 성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백제약품과의 ‘투 톱 플레이(two-top play)’ 체제가 아니었나 싶다.

계열 본사인 백제약품의 전국적 유통망 구축으로 경향 각지의 거래처를 이용하여 광고비 부담 없이 약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는 것이 초당약품이 다른 제약회사들에 비해 누릴 수 없는 최대의 장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삼초제약을 인수, 제약업에 처음 진출했다가 꿈을 접은 시절부터 나름대로 제약 신조를 정리했었다.
‘첫째, 약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게 만들어야 한다. 둘째, 돈벌이가 안 되어도 국민에게 필요한 약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좋은 약을 만들어서 제값을 받고 팔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약속은 초당약품을 창업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초당약품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은 비슷한 어느 제품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높은 효능과 안정성을 평가받고 있다. 약의 효능에 대한 신뢰는 나의 신조대로 ‘적정가 판매’라는 시장원리에도 적용되고 있다.
제약의 신조를 말할 때 항상 먼저 염두에 둬야 하는 중요한 철학은 제약기업을 경영하는 CEO의 인간성, 즉 인성(人性)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초현대적이며 과학적인 시설과 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CEO의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이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약학계에서는 약업인의 사명과 관련, “제약회사는 약의 원료함량과 제조기술 등 모든 것이 생명을 책임지는 제약경영이라는 자부심과 철저한 성업(聖業) 완수라는 지고지대한 철학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유한양행을 창립한 유일한 박사는 언제나 존경받아 마땅한 우리나라 제약인의 참 모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존경하는 약업계의 대선배 유일한 박사와 내가 일맥상통하는 철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흐뭇하고 가슴이 뿌듯하다.

1989년 시행된 전 국민 건강의료보험이 정착되면서 나는 병·의원을 전담하는 백제에치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 이전까지 도매업은 약국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 도매상과 병원 납품을 위주로 하는 입찰도매상의 두 가지로 분리돼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입자유화 시대의 막이 오르자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세분화되었다.

병원 영업을 전담하던 백제약품의 병원부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백제에치칼(주)로 자매회사가 된 것이다. 약국을 중심으로 한 도매업의 의약품 거래 추세가 1992년을 기점으로 병원 및 관납이 약국 유통망을 추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백제에치칼도 급속히 성장해나갔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의약품 공급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10억여원에 이르는 손실을 감수하는 등 눈앞의 불이익이 있더라도 멀리 업계 전체의 이익까지 고려하는 상생과 공존의 원칙을 고수했다.

▲ 현대식 설비와 연구인력을 갖춘 초당약품
의약분업 시행 이후 유통시장은 의약품 도매업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한계에 도달했다.

업계에서는 “약국의 마진경쟁과 병원 의약품 입찰시장에서 저가 낙찰 등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으로 손실을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며 “매출은 늘어나도 이익률은 저하하는 속빈 강정 양상”이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에 백제에치칼은 외형증대 경영보다 내실 있는 경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정도(正道) 경영에 충실한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면 아무리 시장이 어려워도 적정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소박한 신념이 백제에치칼의 안정적인 성장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건강보험과 의약분업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위기로 닥쳤을 때 내가 선택한 대응책은 지점망의 확장, 약사와의 돈독한 인간관계 유지였다.

‘무릇 의약 경영이란 다른 것이 아니야. 사람과 시간을 연결해나가는 과정이야. 인간을 중시하는 기본 신념이 바로 경영의 본령(本領)이 아니겠는가….’

이와 함께 내가 중시한 것은 전문경영인 제도였다.

나는 지금도 환경변화에 따른 발 빠른 대응과 적응을 위해서 자본과 경영을 분리하는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해서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일찍이 백제약품과 초당약품공업, 초당대학교 및 백제고등학교 등에 철저한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해서 시행하고 있다. 해당 분야에서는 좀 더 객관적인 시각과 대응력이 필요하고, 전문 경영마인드를 가진 인재들이 경영현장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한결같은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 백제약품 집무실에 ‘호판단 가운, 지속적 경영(好判斷 加運, 持續的 經營)’이라고 쓴 오래된 편액을 걸어두고 있다.

‘판단을 잘하면 운이 따른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끈질기게 해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다만 적시적소(適時適所)에 올바른 선택과 집중, 판단이 있어야 운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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