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 삶과 인생(8)育林 사업-황무지 돌산에 심은 500만 그루

황무지 동산에 나무를 심어 국내 최대 인공 조림단지 조성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해야 나라가 부강” 소신·지론 펼쳐

▲ 지금은 번듯한 ‘초당림’으로 변했지만 조림 초기에는 연인원(延人員) 3만4000명이 동원돼 일일이 삽과 곡괭이 등으로 조성작업을 했다.

‘아! 초당림(草堂林)-’.

주정공장의 참패에서 완전히 벗어나 백제약방이 발전일로를 걷고 있던 1968년, 나는 약업사업과 더불어 육림사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어려서부터 초당산 언덕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 탓에 산야(山野)의 초목들이 뿜어내는 ‘상큼한  풀내음’을 맡으면서 성장했다. 풀내음은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90평생 그 달콤한 산 냄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늘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 산과 나무는 내 마음의 영원한 안식처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 1950~1960년대 우리나라는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고, 쓸모없이 방치된 땅도 많았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1960년대 말 전국적인 차원에서 산림조성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벌거숭이 민둥산을 조림, 녹화하자는 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매년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해 전국적으로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범(汎)국민운동이 전개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나는 평소에도 “앞으로 산림자원이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고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면서 “정부 차원의 산림정책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터라 정부의 산림조성정책은 나를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조차도 “정부가 식목일을 정하고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숫자놀음일 뿐, 제대로 심고 자라는 나무보다 버려지고 말라죽는 나무가 훨씬 많다. 심지어는 정부에서 나눠준 묘목을 어떤 부락에서는 산 구석에 무더기로 묻어버리는 일마저 있을 정도”라며 정부의 탁상행정을 비꼬고 있었다. 산림이 나중에 엄청난 자원이 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정부나 국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이때다” 하고 무릎을 쳤다.

정부의 국토 녹화사업에 동참하기로 하고 1968년 7월 전남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 일대 임야 187만여 평(약 618만㎡)을 사들였다. 1969년 영림계획서를 작성, 영림허가서를 받으면서 드디어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영림허가를 받은 다음 곧바로 인접한 임야 100만 평(약 330만5700㎡)을 추가로 사들이는 등 총 320여만 평(약 1058만㎡)의 광대한 임지를 마련했다. 300만 평(약 992만㎡)이 넘는 면적은 남한 임야면적의 8000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넓은 것이다. 매입 당시에는 잡목과 돌산으로 여러 개의 산과 이어져 가운데로 국도가 관통하는 들과 자갈로 뒤덮인 험악한 산야에 불과했다.

나는 그때부터 명주리 일대 황무지 동산에 20년 동안 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초당림’이라는 국내 최대의 인공조림단지를 조성했다. 

‘나는 약업계에 투신해 평생을 종사하면서 성공이라면 큰 성공도 했고, 돈을 벌었다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필생의 역점사업은 약업보다 오히려 조림·육림 사업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을 숲과 풀내음 속에서 보내던 나의 삶은 항상 나무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우리 강산이 헐벗고 메마르다면 이것은 곧바로 우리 민족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여건만 허락한다면 사람을 키우듯이 나무를 키워낼 거야”라는 소신과 지론을 주변에 펴왔다.

당시 나에게는 나무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저 산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 베어가지 못하게만 하면 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것이요, 그렇게만 되면 헐벗은 민둥산이 아름다운 산을 이루게 될 것이야. 50년 후, 100년 후에는 그 나무가 거목으로 자라서 훌륭한 국가재산이 되고 말 거야…’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이었다.

인공조림단지 조성은 10년, 20년을 계속 투자하고도 곧바로 돈이 나오는 그런 사업이 아니었다. 물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사업은 아니었지만….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서 제 몫을 하게 되고, 그것이 돈으로 환산되려면 최소한 심은 날로부터 50년, 100년은 가꾸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창 힘들어하고 있는 그 즈음 조림 전문가들이 나에게 찾아와 따끔한 충고와 고언(苦言)를 아끼지 않았다.

“나무를 심어서 당대(當代)에 돈을 벌려고 해서는 절대로 실패합니다. 매년 방충방재(防蟲防災)를 해줘야 하고, 비료주기와 밑풀깎기 작업을 해야 하며, 최소한 3년에 한 번 씩은 나무 한그루 한그루마다 가지치기를 빼놓지 않고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임도(林道·임산물의 운반 및 산림의 경영관리상 필요해 설치한 도로) 관리도 절대로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그들의 조언은 나무를 심고 보살피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인공조림단지를 현장에서 직접 관리하기 위해 상주하는 직원은 15명 정도이지만 그동안 묘목식재와 나무관리에 투입된 연인원(延人員)은 무려 3만4000명에 이른다. 나무를 관리하기 위해 산속에 개설한 인도만 해도 50㎞나 된다. 나무를 현지에서 가공하는 목재소도 만들어 가동 중이다.

인공조림을 시작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 각고 끝에 심어놓은 나무가 약 500만 그루에 이른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초당림에서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1차 조림으로 심은 나무들이 이제는 제법 아름드리 수목으로 우람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가 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인공조림단지와 그렇지 않은 다른 산들을 한눈에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행착오와 시련도 적지 않았다.

인공조림단지에서는 가장 무서운 것이 산불이다.  병충해는 미리 약재를 살포해서 예방하거나 처음부터 병충해에 강한 수종(樹種)을 선택하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산불은 한번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만다.

명주리 산에 조림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1978년 3월 5일, 첫 번째 산불의 피해를 입었다.  그날도 나는 목포에서 백제약품의 업무를 급히 처리해놓고 부랴부랴 차를 몰아 명주리 조림단지로 달려갔다. 오후 2시쯤 현장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사방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고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사무실 뒤쪽 산에서 잇달아 “불이야” “큰일났네”라며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논두렁을 태우다가 그 불길이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산으로 번져 조림단지까지 옮겨붙은 것이었다. 현장 직원들과 현지 주민들이 합동으로 진화작업을 편 끝에 내가 도착했을 때는 불길이 거의 다 잡힌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땀과 연기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농장장이 나에게 달려와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엉엉 울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해가면서 구덩이를 파고 흙을 나르고 옮겨 심고 가꾼 나무들인가. 이미 속으로 절망을 했지만 그래도 먼저 인명피해를 걱정해야 했다.

“혹시라도 다친 사람은 없는가?”
“네. 다행히….”
“피해 면적은 어느 정도나 되고?”
“6000평(약 2만㎡)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여보게! 산불은 이왕 나버린 것이고… 너무 상심하지 말게. 큰일을 하려면 이만한 일은 각오를 해야지.”

농장장을 애써 위로한 뒤 피해 현장을 둘러보았다. 10년 동안 온갖 각고와 정성을 들여서 심어놓은 나무들이 온통 새카맣게 불에 타고 그슬려 있었다. 내 몸에 화상(火傷)을 입은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프고 쓰라렸다.

1000정보(약 992만㎡)의 드넓은 임야 가운데 2정보(약 2만㎡)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다. 명주리 조림단지는 1989년 4월 8일에도 두 번째 산불이 나서 약 9000평(약 3만㎡)의 면적이 불에 타버렸다. 해송·리기다송 등 15년생 이상의 나무가 9000그루 이상 피해를 입고 말았다.

▲ 20년간 500만 그루를 심어 일군 초당림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