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삶과인생(10) 有終의 美-5.16 민족상 · 동탑 산업훈장의 영광

천연림 인공림 조화롭고 환상적인 파노라마 이룩
조림사업의 올바른 벙향타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

 

▲ 고건 전 총리는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을 맡고 있던 1973년 ‘제1차 치산녹화계획’을 주도했다. 이 계획의 성과로 우리나라는 국민조림·속성조림에는 성공했으나 치산녹화의 세 가지 원칙 중 마지막 하나인 경제조림은 아직 미완이다. 이 때문에 고 전 총리는 최근까지 수차례 초당림에 방문하며 경제조림 성공과 토종 경제수종 개발을 염원하고 있다. 2011년 4월 29일 초당림을 방문한 고 전 총리가 아름드리 나무를 매만지고 있다.

유종지미(有終之美)라는 말이 있다. 결실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전남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의 임야를 확보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한 지 올해로 45년이 되었다. 그동안 일생일업(一生一業)인 백제약품보다도 사실은 이 조림사업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투입해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초당림을 찾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무를 심고 가꾸어 그 나무가 제 몫을 하기까지에는 무려 50~100년의 장구한 시일이 필요하다. 내가 처음 조림사업의 뜻을 밝혔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이 “무모한 짓”이라며 반대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나는 ‘푸른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평생의 조림사업이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해서 명주리 일대의 초당림은 한국 임학계(林學界)로부터 개인이 조성한 인공 조림단지로는 최우수 단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 국내의 임학 교수와 전문가들이 초당림을 몇 차례 방문했다.

“우리가 명주리 일대의 인공 조림단지를 둘러본 결과 모두 300만 평의 임야에 500만 그루의 경제수목을 식재했고, 350만 그루의 입목(立木)을 보유한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대단합니다!”
“삼나무·편백나무·테다소나무·백합나무 등으로 천연림과 인공림이 조화롭게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이룩했습니다. 육림입국(育林立國)을 향한 푸른 의지의 나래를 활짝 펴는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됩니다.”
“초당림은 개인이 조성한 인공 조림단지 중에서는 국내 최대의 면적이요, 마치 일본의 조림단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단연 최우수 수준입니다.”

그들의 극찬(極讚)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정부에서도 이 같은 공적을 인정해서 1980년에 5·16 민족상을, 1987년에는 동탑 산업훈장을 나에게 주었다.

특히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1987년 4월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강진에 임야 621헥타르를 매입한 지 18년 9개월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고치는 약의 정신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육림정신은 서로 같은 차원의 ‘경세제민(經世濟民·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함) 사상’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과 소신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훈장의 소감을 마음속으로 정리해봤다.

‘국토의 70%에 이르는 산지, 그나마 전쟁과 남벌(濫伐)로 만신창이가 된 민둥산을 조림사업을 통해 아름답고 풍만한 푸른 동산으로 회복하겠다는 목표는 바로 백가지 병을 고쳐 고통받는 환자를 구하겠다는 백제약품의 창업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니겠어. 암 그렇고말고….’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뒤 나는 조림사업과 관련한 각종 심포지엄의 단골 연사(演士)가 되었다. 장기간 숲을 가꾸면서 몸소 체험한 귀중한 경험들을 빠짐없이 전하는 ‘조림사업의 전도사(傳道師)’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자리가 1989년 11월 산림청과 경기도에서 주관하고 KBS와 한국임학회가 후원한 육림 심포지엄이었다. 여기서 독림가(篤林家·모범 임업인)로서의 성공사례 발표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가졌다.

나는 “돌바위를 캐고 객토(客土)까지 하면서 나무를 심고, 산림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산림 구석구석에 임도(林道)를 개설하는 등 육림사업을 몸소 실천했다”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그리고 험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명주리의 거친 임야를 모두 푸른 숲으로 가꾸어 우리나라가 산업용 목재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나가겠다”고 역설해 좌중으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1990년 11월 한국임학회는 나의 공적을 치하하는 ‘초당림’ 기념비 제막식을 열어줬다. 바로 전남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의 초당림에서였다. 감개가 무량했다.

▲ 5.16 민족상
기념비에는 ‘임업입국(林業立國)의 큰 뜻을 펴기 위해 3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육림사업에 앞장서온 김기운 회장의 공적을 치하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안경 너머 눈가에 가벼운 이슬이 맺히고 콧날이 시큰했다.

2006년 1월 24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임업인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눈앞의 단기적인 이익추구가 아니라 후손들이 누릴 미래를 생각하는 임업인을 부른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은 “조림산업을 멀리 내다보고 도모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긴 시간을 기다리면서 나무를 가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 자리에 장남 김동구 백제약품 회장을 보내서 1969년부터 조성한 초당림의 역사에 대해서 그동안의 애환과 결실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가감없이 설명하도록 했다. 청와대에 다녀온 장남으로부터 노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초당림 조성에 대해 흐뭇해했다는 반응을 듣고 나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1968년부터 초당림 조성에 대해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일기를 모아 두 권의 책을 간행했다.

첫 번째가 <초당육림일기>이며, 두 번째가 <초당육림 40주년>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농작물은 거름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사랑과 정성을 먹고 자란다“는 말을 귀에 따갑게 들었다.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권의 책에 ”돈만 있다고 조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애정과 정성이 깃들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내 조림철학을 소상하게 서술했다.

1980년대 이후 서울에서 나오는 조선·중앙·동아일보 같은 메이저 신문을 비롯해서 중앙 매스컴과 각종 잡지, 인터넷 매체에서 초당림과 내가 큰 기사로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조림사업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거듭 강조, 계몽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 책이 가급적 많이 읽히기를 원한다.

조림사업 45년 세월에 나도 어느 정도 조림 전문가가 된 것일까. 어릴 적 서당에서 배운 당구삼년폐풍월(堂狗三年吠風月·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동안 일본에서 들여온 지타기(枝打機)와 임간용 사다리를 사용해본 뒤 이를 토대로 나는 더 편리한 한국형 지타기와 독일식 꼬갱이를 자체 제작했다. 또 한국형 사다리를 개발, 제작해서 특허까지 신청하는 등 마치 ‘조림 발명왕(發明王)’이 된 것처럼 제품개발과 특허신청에 이것저것 온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조림단지는 계속해서 묘목을 키워내고 수종갱신을 해나가야 한다. 또 조림면적을 넓혀야 하고, 지속적인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그만큼 노력하고 정성을 쏟을 곳이 많다는 뜻이다. 이렇듯 육림에는 돈과 기술 및 인력, 그리고 인내심과 같은 세 가지가 한 박자를 내는 삼위일체(三位一體) 정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조림 40년 동안 가장 안타깝던 순간은 태풍과 산불에 따른 피해였다.

첫째, 태풍이다. 지난해 가을 초대형 태풍이 몰려와 초당산의 아까운 나무 수천 그루가 뭉텅뭉텅 넘어지고 뿌리째 뽑힌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마치 내 자식들이 몸이 다쳐서 아파 드러누운 것처럼….

둘째, 산불이다. 외국 밀림지대에서 발생하는 산불은 나무끼리 마찰을 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가 사람들의 잘못으로 산불이 일어난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차례 대형 산불로 까맣게 탄 초당림을 보며 “육림(育林)은 미친 짓”이라며 후회도 해봤다. 산불이 날 때마다 나는 기도를 한다. 기도를 통해서라도 부디 산불을 예방하자는 취지에서다.

‘사람은 전지전능한 신(神)이 아니다.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실수를 두 번, 세 번 되풀이하고 만다.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해주소서….’

같은 재해라도 태풍에 따른 피해는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천재(天災)라고 치자. 그러나 한번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는 산불 피해는 너무나 안타깝다. 평소 조심만 하면 분명히 막을 수 있는데도 대부분 인간의 부주의로 발생하는 ‘인재(人災)’이기 때문이다.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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