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삶과인생(11)育英사업-고향에 학교를 세우다


나는 제약회사를 차려 번 돈으로 고향인 전남 무안에 고등학교, 대학교를 차례로 설립했다. 다른 대도시에 학교를 설립할 여력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무안을 고집했다. 내가 무안에서 나고 무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고향은 특히 내 일생에서 옛 추억과 그리움이 미래로 달리는 열차의 레일과 같았다. 그래서 골똘히 생각을 했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고향을 위해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흰 도포 차림의 한 노인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자네는 지금 고향 무안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찾고 있네. 그렇다면 좌고우면하지 말고 당장 학교를 세우게나. 어서 당장.”

나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식은땀이 잔등에 배어 있었다.‘그렇다! 학교를 세우자. (나무를 심듯이) 학교를….’사람을 키우는 일이 내가 해야 할 마지막 보람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바로 학교 설립이 아니겠는가. 지역의 인재를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것이야말로 고향에 보답하는 최선의 길이었다. 간절하게 꿈을 꾸면, 그것도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꿈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당시 무안군에는 2개 읍, 7개 면이 있었다. 중학교가 7개 있지만 무안읍내에는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가 단지 1개교밖에 없었다. 보수적인 농촌성향 때문에 남녀 공학의 고등학교에 여학생들이 진학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은 목포나 나주, 심지어는 멀리 광주로 보내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원거리 통학으로 교통비 부담과 시간 낭비가 심했다. 목포나 광주에 하숙을 시키는 경우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이 엄청났다.

자연히 무안군 관내는 여자의 고등학교 진학률이 매우 저조했다.나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안읍내에 여고를 설립하기로 하고, 인문계보다는 실업계 여고를 세우는 것이 농촌살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문계 여고를 졸업한 뒤에는 취직이 어려울 테니 차라리 여자상고를 설립, 졸업 후 곧바로 취직을 시키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내가 학교설립 계획을 밝히자 뜻밖에도 많은 주변 사람들이 반대 의견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회장님! 교육사업은 돈만 엄청나게 들어가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요. 설령 학교를 세운다고 해도 목포나 광주, 서울과 같은 인구 밀집지역에다가 해야지 인구가 적은 농촌 읍내에서, 더군다나 여상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랑께요.” 백번 지당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어찌 꿩이 봉황의 깊은 뜻을 알겠는가.

나는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설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얼마 후 관계자로부터 조사 결과를 들었다.“매년 무안군 관내에서만 1500여명이 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있으나 이 가운데 약 65%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있습니다. 여고 진학자 가운데 거의 80%가 목포나 광주를 선택하고 있어서 매년 학생 1인당 불필요한 학비가 50만원 이상 지출되고 있습니다. 또 농촌 실정으로는 대부분 딸을 대학까지 진학시킬 능력이 모자랍니다. 따라서 여상으로 진학시켜 ‘졸업 직후 취업’을 학부모와 학생들이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가 나온 뒤 나는 힘을 얻어 학교설립 준비를 들어갔다.

‘그래, 나는 계산을 맞추고 수지를 따져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학교롤 설립하는 게 아니야. 이제 만년(晩年)에 가까운 나이에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꿈을 안겨준 고향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되돌려 주고, 고향의 발전에 도움을 주어야만 해.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학교를 세워야 운영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지적도 옳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교운영을 타산적으로 따지고 사업적으로 계산할 때나 맞는 말이야….’

처음 “푸른 동산을 만든다”는 일념만으로 나무를 심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번엔 인재를 키운다”는 결연한 심정 하나만으로 학교설립 절차에 들어갔다.그런데 학교설립의 결정적인 힘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던가. 많은 사람이 학교설립에 부정적인 뜻을 밝혔지만 오직 한 사람-아내는 적극적으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줬다.

“여보! 학생을 가르치는 육영사업은 좋은 일이 아닌가요. 그러니께 우리가 어릴 적에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얼마나 설움을 겪었던가요. 누가 뭐라고 혀도 나는 당신 편이닝께. 그대로 한번 밀어붙여 보시드라고요… 잉-.”

고향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말해주었더니 아내만은 적극 찬성이었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나는 그야말로 용기 백배했고, 백만 원군을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임자가 그렇게 생각헌당께 나도 불뚝 힘이 나는 구먼. 참말로 고맙구먼 그려. 고맙고 말고… 임자!” 나는 아내의 두손을 덥썩 잡고, “부부애가 이런 거구나”하는 감회에 젖었다. 그런데 내가 학교설립에 한창 골몰해 있던 1977년 12월 27일 아내 최금운(崔錦雲)이 혈전증(血栓症)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는 평소에 “사주관상을 보니 나는 90세까지 살 것이고, 당신은 70세까지 살 것”이라며 늘 건강에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사주관상도 아무런 소용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보니 세상만사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나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열아홉 살에 보잘것없는 남편을 만난 것이나, 시집이라고는 와서 달콤하다는 신혼생활을 맛보지도 못했고, 약방을 개업한 뒤 돈을 만져볼 수도 있었지만 그 흔한 ‘비로드 치마’ 한 벌 해 입지 않고, 아무리 짐이 많더라도 절대로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만 고집하던 아내. 타고난 근검절약 정신으로 안 쓰고 안 먹고 안 입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전형적인 ‘한국의 아내상’이 선천적으로 몸에 밴 여인이었다.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아이들 가정교육에도 남달리 빈틈이 없었다. 또 많은 직원들 뒷바라지에 한평생 고생만 해왔다. 59세라는 나이에 환갑잔치도 못 해보고 무엇이 급해서 그렇게 떠났는 지 너무나 아쉽고 슬프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생전에 학교설립을 남달리 응원했던 아내가 사후에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전에 알뜰하게 모아서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돈을 저축해 놓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이 돈을 새로 설립할 학교부지를 구입하는 데 쓰기로 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무안읍 성남리 419번지의 산에 10만 평이 넘는 확 트인 부지를 확보하고, 학교설립 절차에 들어갔다.

마침내 1979년 4월 10일 인가를 받아 학교법인 초당(草堂)학원을 설립, 백제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세우는 기틀을 마련했다. 초당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초당산 부락의 명칭이자 내 아호이다. 여기서 따와서 초당학원이라 했다. 학교 이름은 이 고장이 옛 백제 땅이니 백제여자상업고등학교로 정했다.

당초 이곳을 학교부지로 정했을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회장님! 이곳은 너무 산 속이고 으슥한 곳이어서 여학교를 세우기는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요-.” 그러나 나는 “부지정리를 끝내고 제 위치에 학교를 세우면 별문제 없을 것 같네. 넓은 운동장을 마련하고 조경사업만 잘하면 여기보다 더 좋은 학교 터는 없을 것이야”라고 반박을 했다.

700m 전방에 목포, 광주를 잇는 포장국도가 뻗어 있고, 그 국도에서 남쪽으로 자리 잡은 학교터는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대지 정리작업과 교사 신축공사, 조경작업에 이르기까지 나는 연일 신바람나게 뛰어다녔다. 다른 일을 모두 제쳐놓고 현장을 다니며 일일이 총지휘를 하다시피 했다.

나는 평소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 ‘난향천리, 덕향만리(蘭香千里, 德香萬里)’라는 고사성어를 애용한다. ‘1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며 사람을 심는다’, 그리고 ‘난초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큰 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고, 큰 덕을 쌓는 일의 중요성을 비유한다. 그 첫 단추가 바로 백제여상의 설립이었다.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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