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삶과인생(12)백제여상 설립과 제2창학

1979년 11월 21일 드디어 문교당국으로부터 백제여상 설립인가가 나왔다. 인가학급 수는 6학급이었다.

교사(校舍)의 신축공사를 마무리하고 책상·의자를 비롯한 교구(敎具)와 사무실 집기, 비품 등을 서둘러 완비했다. 타자기, 계산기, 컴퓨터, 시청각교육 기자재, 방송 기자재 등을 구비했다. 원거리 농촌지역의 통학생을 위해서 스쿨버스도 들여왔다. 또 장애인 슬로프, 수세식 화장실 등 당시에는 서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인 최신식 건물과 선진 시설을 갖추었다.

소식은 삽시간에 관내 중학교는 물론 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새로 문을 여는 백제여상이 굉장허당께. 돈을 몽땅 들여서 삐까번쩍한 현대식 학교건물을 지은 것은 물론이고 스쿨버스까지 확보해서 학생들을 등하교 시킨다고 허네. 다른 시설도 온통 최신식으로 일류래여….”

이런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주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제1회 신입생 모집에 뜻밖에도 정원을 훨씬 넘는 500명이 지원해서 나는 물론 모든 학교 관계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당국에 2학급 증설을 긴급히 요청, 모두 8학급 483명의 첫 신입생을 선발했다.

1980년 4월 16일. 백제여상이 드디어 역사적인 개교식을 가졌다. 전남의 수많은 기관장을 비롯해서 무안군수, 무안경찰서장, 그리고 수백 명의 학부모와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교식에서 나는 감격스러운 이사장 인사를 하게 되었다.

“(중략) 오늘 이곳 승달산 기슭에 자리를 하고 보니 제가 태어난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초당산 마을에서 책보를 허리춤에 메고 20여 리나 되는 학교에 가는 길에 넘던 높은 고개가 생각납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오가야 했던 등하굣길이고, 그 고개를 넘으면서 일생을 살아오게 된 용기와 인내, 그리고 능력도 배운 것 같습니다. (중략)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것이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환경 또한 밝고 정숙하여야 학생들이 마음껏 자기의 능력을 기르도록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없이 기쁘고, 가슴이 뿌듯하고, 성취감이 한데 어울린 그런 복합적인 감정의 산물이었을까. 나는 이 자리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사말로는 다 하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목포의 일본인 상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가 겪었던 고달픈 시절, 카페인을 먹어가면서 기어이 독학으로  양약종상 면허를 따겠다고 발버둥 치던 그 수많은 밤…. 이발료 10전을 아끼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 올라갔던 유달산 달동네의 무허가 이발소…. 그동안 겪어온 고난과 아픔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내 눈앞을 휘~익 스치고 지나갔다. 우람하고 멋있게 솟아오른 학교 건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교정, 드넓게 자리 잡은 학교 운동장, 그 운동장에 가득한 꿈 많은 소녀들….

이날 눈물은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고, 억울해서가 아니라 행복에 겨워서 흘린 가슴 뿌듯한 보람찬 눈물이었다.

고향에 바치는 마지막 정성으로 세운 백제여상의 설립자훈(設立者訓)은 ‘씩씩하고 진실하게 능력을 기르며, 봉사정신이 투철한 인간성을 구현한다’로 정했다.

그리고 교훈(校訓)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했다. ‘참해라. 힘 있어라. 노상 섬겨라.’

이 교훈은 전 국회의원 박윤종(朴潤鍾)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참해라’는 항상 정숙하고 진실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가 되라는 뜻이다. ‘힘 있어라’는 지혜와 능력을 지닌 여자가 되라는 뜻이요. ‘노상 섬겨라’는 친구를 섬기고, 스승을 섬기고,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섬기는 봉사와 희생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여자가 되라는 뜻이다.

백제여상은 1980년에는 30학급으로 학급증설 인가를 받았고, 1982년에는 36학급으로 다시 늘어났다. 그만큼 백제여상에 입학하려는 학생이 마구마구 몰려왔던 것이다.

“일단 백제여상에 들어가기만 허면 모든 것이 끝내준다고 허네 그려. 현대식 건물 및 완벽한 교육시설과 기자재, 수준 높은 교사진, 쾌적한 교육환경, 거기에 스쿨버스 운행으로 도시 사립학교나 다름없는 일류 학교생활을 한다고 들었당께요….”

무안군은 물론 목포시, 나주시, 영광군, 함평군, 신안군에까지 크게 소문이 나서 이곳 출신자들이 백제여상 입학을 대거 희망해오고 있었다.

학교 본관 왼쪽 산허리에 새로운 건축공법으로 건립한 강당 겸 체육관은 국제규격의 핸드볼 구장과 객석을 마련했다. 평소에는 학교행사 때 강당으로 활용하고 핸드볼 팀의 훈련과 경기장으로 이용했다.

체육관이 들어서자 먼저 떠나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체육관을 아내의 이름을 따서 금운관(錦雲館)으로 명명했다. 평소에 근검절약해서 저축으로 큰돈을 남겨 학교 부지를 구입하게 해주고 간 아내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무안에 백제여상이 설립되어서 2000여 명의 시골농촌 여학생이 1인당 한 해에 50만원 이상의 불필요한 지출을 덜게 됐다. 무안군 학부모들이 광주나 목포에 학생을 보낼 경우 학비 외 경비를 절약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실력을 닦아서 수학 경시대회, 영어 웅변대회에서까지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또 백제여상 졸업 직후 취업해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취업률은 무려 99%까지 기록했다. 이 얼마나 흐뭇하고 기쁜 일인가. 졸업 시즌이면 기업체 취업담당자들이 경쟁적으로 학교에 몰려들었다. 

“백제여상 졸업생은 대부분 성실성과 업무처리 능력이 탁월하고, 그리고 ‘노상 섬겨라’의 교훈으로 가르친 덕분인지 다른 학교 졸업생들과는 달리 희생과 봉사정신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졸업 전에 먼저 스카우트를 하기 위해 학교에 찾아왔습니다.”

많은 기업체에서 잇달아 백제여상 졸업생의 추천을 의뢰해오고 있었다. 이에 학교에서는 아예 취업전담 교직원을 서울에 상주시켜 ‘안정된 직장에 취업시켜야 비로소 졸업시키는 것’이라는 목표를 정하고 졸업생의 전원 취업을 위해서 열과 성을 바쳤다. 졸업생들은 목포, 광주는 물론 서울의 금융기관과 재벌그룹 기업체까지 매년 취업률이 늘어났다. 

어떤 졸업생들은 열손가락에 손꼽히는 기업에 취업해서 성공한 다음 훌륭한 신랑과 결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시골처녀들이 이른바 ‘여사님’으로 불리는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아! 그렇구나. 내가 백제여상을 설립하지 않았더라면 중졸 학력으로 평범하게 살았을 시골처녀들이 이제 전국 각지의 기업·은행에 진출해 이렇듯 훨씬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교육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업이야. 암만 그렇고말고….’

내가 그들의 인생길을 성공적으로 인도한 ‘행복의 전도사’가 된 셈이다.

1999년 백제여상은 인문계 2학급을 신설하고, 2000년 3월 1일 백제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른바 ‘제2 창학’을 하게 된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당께. 백제여상에 남학생을 진학시켜서 남녀공학으로 만들고, 실력 있는 학생들을 대학에 보낸다면 그것이 이사장님이 바라는 진정한 육영사업이 아니겄습니까요? 잉-.”

그동안 지역사회에서는 남녀공학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사라진 것을 감안해 백제여상을 남녀공학으로 바꾸고 인문계 반을 신설, 대학진학률을 높여달라는 요청이 날로 일고 있었다.

백제여상의 건학이념과 교훈을 그대로 이어받은 백제고교는 여느 학교와는 다른 특성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나는 백제여상을 설립할 때부터 5년이고 10년이고 적자운영을 하더라도 전국에서 가장 취업을 잘하는 학교 가운데 하나로 만들 각오였다. 그리고 특색 있게 혼(魂)과 얼을 담은 ‘초당(草堂)식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그 구상은 적중했고, 나는 여전히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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