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호 본지 논설위원·덕성여대 독문과 교수

최근 대전의 모대학에서 국문과를 비롯한 인문학의 몇 과를 통합 혹은 폐지하는 안이 발표되자 (잠시) 인문학이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국문과가 그 대상에 들어 언론의 반짝 주목을 받은 듯하다. 혹여 국문학이 지금까지 인문학의 위기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오히려 익숙한(?) 용어가 되어 버렸다. 다만 그 원인 진단에서 아직 합의가 도출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인문학 관련 학과들의 위기라고 주장한다. 인문학은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인기라며, 인문학 관련 강연과 모임들이 얼마나 관심을 끌고 있는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인문학을 단순히 거리인문학, 방송인문학이라 할 수 있는 이를테면 ‘썰’의 인문학으로, 아마추어리즘으로만 인식하는 지극히 피상적 시각이다. 인문학 발전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인문학 관련 영역의 발전은 항상 공적 제도나 기관의 형성과 밀접히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여기에는 권력의 후원도 때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대로 독재자나 권력에 의해 인문학 관련 분야가 억압을 받을 때에는 그 분야가 제일 먼저 제도권에서 밀려났다.
 
이 말을 인문학자의 아전인수 논리라고 여길 사람들을 위해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의 견해를 언급해보자. 사회과학조차 문화과학으로 보고자 했던 그는 모든 사회정책은 문화적 맥락의 의미를 가지며, 문화적 의미를 가진 사회정책의 결정에서는 신념과 가치가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었고, 되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즉 인문학 관련 학과의 재편에서도 수치와 통계는 그렇게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함은 (적어도 유럽의) 사회과학적 시각에서도 명백하다. 인문학 관련 학과의 유용성에 대한 비판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취업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논거라고 하겠다.
 
그럼 수요의 문제는 어떤가?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줄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지원도 줄어들기 때문에 인문학을 중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인과성을 무시한 편협한 견해다. 사회적 수요의 문제에 관한 한 그 원인은 인문학 자체의 책임보다는, 많은 경우 사회경제적 정책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정 부분 인문학이 사회적 수요 창출에 실패한 자책은 가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정책을 통해 인문학을 배제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가치와 행복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정책당국이라면 인문학을 제도적으로 배척하기 보다는 인문학이 새로운 사회경제적 수요를 창출할 수 있게 지원하거나 적어도 그럴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경제정책의 화두인 창조경제는 이런 맥락에서 실천되어야 구호가 아닌 성공하는 정책이 되어,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경제성장을 이룩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인문학 혹은 대학의 인문학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그들의 뜻대로 판단하라고 권하겠다. 다만 문득 자신의 생각에 회의가 들 때 다음의 가정법을 떠올려 주기를 바라면서 - 만약 대학에서 인문학이 없어지면, 우리는 거리에서나 방송에서 언제라도 인간의 행복을 즉석에서 제조해서 파는 더욱 실용적인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만약 대학에서 인문학이 없어지면 학생들은 더 행복할거야, 쓸데없는 인문과목 입시 공부나 취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만약 인문학이 없어지면 동북아는 더욱 행복할 거야, 골치 아픈 과거는 잊어버리고 현재만 생각하면 되니까. 만약 인문학이 없어진다면 우리사회는 더욱 더 행복할 거야, 타문화는 모르고 우리만 생각하면 되니까.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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