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 삶과 인생(14)초당대 설립

홍익인간(弘益人間).‘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이기도 하다.

나는 육영사업을 시작하면서 ‘참다운 인성(人性)교육’과 ‘참다운 인재양성’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원래 홍익인간은 인류의 보편타당한 진리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학교를 세우면서 평소 철학관인 이 말을 창학(創學) 및 교육 이념으로 삼아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처음 백제여상을 설립할 때(1979년) 보았던 흰 도포 차림의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여보시오! 그대는 일찍이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백제여상(현 백제고교)을 설립했네그려. 그런데 그대가 꿈꾸는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급 인재를 양성해야 하네. 그러려면 지금 단계보다 높은 학교(대학교를 지칭)를 한번 설립해보시오….”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서 잠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그러나 이 꿈은 묘하게 여운을 남겼다. 그날 밤 나는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래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백제여상 운영을 통해 육영사업이야말로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뜻깊은 사업이란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992년 중국과의 수교로 이른바 서해안 시대가 열린 것을 계기로 우수한 고급 인재를 양성, 국가와 지역사회에 봉사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구상을 하나씩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 꿈속에서 나타나 대학 설립을 권고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밤 영감을 받고 두 손뼉을 크게 마주쳤다. 곧바로 교육부에 초당대 설립인가를 신청했고, 1993년 11월 30일 마침내 인가장이 발급됐다. 1994년 3월 7일 모두 7개 학과 700여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여 제1회 입학식을 가졌다. 내 나이 75세였다. 남들 같으면 은퇴해서 손주나 보고 있을 나이에 대학교를 설립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과연 잘하는 일인가 싶었다.

초당대 설립을 추진할 당시 백제여상을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많은 사람이 “회장님! 대학이야말로 수도권에 설립해야 합니다. 지방에서의 대학경영은 정말로 어렵습니다”라며 만류했지만 나는 끝까지 “내 고향 무안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고 대학설립을 밀어붙였다. “여보게!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이 있어야 지역도 살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오로지 내 고향 발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대학을 세우려고 하는 마음뿐일세….”

육영(育英)사업은 육림(育林)사업과 일맥상통한다. 인재나 나무나 어려서부터 올바르게 심혈을 기울여서 키워야 한다. 그래서 초당대를 설립하면서 올바른 지식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교육한다는 취지 아래 건학(建學) 이념을 ‘올바른 인식을 공감하며, 그 공감을 행동으로’로 정했다.

초당대 개교식 날인 1994년 3월 7일 나는 이사장으로서 인사말을 했다. 다시금 감회가 깊었다. 연설 도중 목이 메고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그래서 일부러 헛기침을 해서 긴장을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물도 마시면서 솟구쳐오르는 흥분을 달랬다.

“(중략) 우리나라는 지난 1960년대 이후 지속적인 공업화를 추진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아직도 선진국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학생 여러분은 고도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 지식을 얻는 데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협동하고 신뢰심이 가득한 인격 도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교수님 여러분도 온정과 인자함을 겸비하여 자식이나 동생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학생들에게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귀빈 및 학부형 여러분은 우리 학생들이 우리나라 산업사회를 주도하고 세계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되도록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기술인, 문화인, 세계인이 됩시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김기운 이사장이 실업계 진출을 목적으로 한 백제여상의 개교와 우수한 졸업생 배출로 첫 번째 육영사업이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초당대 설립은 이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면서 “다가오는 서해안 시대를 주도하고 국가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우수한 인재를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라고 좋은 평가를 해주었다.

나는 대학도 교육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교수와 대학 관계자들에게 힘주어 말한다.

“교육의 내실을 한마디로 말하면 ‘소수정예(少數精銳)’입니다. 학생 수는 줄여도 괜찮습니다. 대신 초당대에 들어온 학생은 무조건 교수가 취업까지 책임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 실력 있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키워 사회에 내보내는 것까지 대학이 의무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울러 학과·전공은 좀 더 비전 있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변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초당대는 지난 2011년까지는 우수대학 평가도 받았고 최상의 취업률을 유지했었다. 지난 2000년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과 산학협력부문 우수산업대학, 2001년 교육개혁 우수대학, 2002년 교양교육 평가분야 우수대학, 2003년 지방대학 육성 재정지원 우수대학에 각각 선정됐다. 또 환경연구소는 5년 연속 전국 우수연구소에 선정됐으며, 2011년에는 한국언론인연합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참교육 대상 시상식에서 지역발전 교육 우수대학에 선정됐다.지난 2004년, 2005년도에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주관한 전국 371개 대학의 동년 2월 졸업자 53만여명을 대상으로 하는 취업부문에서 초당대는 학생 수 기준으로 나눈 B그룹(1000~2000명)에서 전국 대학교 가운데 87.2%의 취업률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자연계열에서는 초당대 조리과학부가 100% 취업률로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과 2012년 2년 연속 정부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지정돼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아픔도 겪었다.

초당대는 현재 김병식 총장이 중심이 되어 이 같은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일종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라고나 할까. 농사짓는 사람이 밭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개교 이래 나는 대학운영을 철저히 전문교육자와 구성원에게 맡기고 있다. 김병식 총장은 30년 이상을 대학에 몸담아온 대학경영 전문가다. 초당대는 올 1월 지난 2009년 3월부터 재직한 김병식 총장의 연임을 확정했다. 초당대 역사상 총장 연임은 처음이다. 나는 김 총장이 지난 4년간 수립, 실현해온 대학발전 계획을 연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그동안 ‘점프업(Jump Up) 프로젝트’를 가동, 학내 교육·복지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일반대 전환과 슬로문화 특성화, 항공운항계열 신설 등을 통해 초당대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나는 가끔 김 총장과 식사를 한다. 대학경영에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지만 학교 발전을 위해서는 그에게 덕담을 건넨다.

“나는 오랫동안 기업을 경영해왔지만 이는 대학경영과는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초당대가 지역대학의 성공 모델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교육전문가가 경영을 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김 총장님을 모셔온 것이며, 총장님을 비롯한 교수·직원들이 초당대를 훌륭히 경영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쳐 지역발전에 대한 내 뜻을 착착 이뤄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 인생역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1946년 목포에서 문을 연 백제약방이 운 좋게 많은 돈을 벌어서 다른 업종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했지만 과욕이었고, 본업인 약방까지 접어야 할 위기를 경험했다. 그 뒤 가까스로 재기하면서 ‘한우물만 판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대학경영을 한우물만 파온 교육전문가에게 맡긴 것이다. 나는 2003년 2월 12일 정부로부터 교육에 대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산업·국세·조림에 이어 교육 부문에서까지 훈장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는 단순히 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학교와 지역의 영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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