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진 인하대 교수

*** 한국대학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아 국내 대학 연구자들의 연구환경을 돌아보면서 △우수한 연구 △참신한 연구 △흥미로운 주제를 가진 연구 등을 발굴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지원 성과와 정보를 공유하는 취지에서 연속기획 ‘괴짜과학자들의 위험한 연구’를 마련했다. 자기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에 뛰어든 학자들의 파격적인 상상력을 뒤쫓아 가보자.

 

▲조선시대 환관(내시)에게 거세는 생존수단이었다. 질병이나 사고, 생계를 위해 환관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 노화생물학 전문가 민경진 인하대 교수(사진)는 지난해 조선 환관들의 족보를 통해 인간 생식과 노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의미있는 결과를 얻었다. ‘모험연구’2년차 연구에 돌입한 민 교수를 지난 1일 연구실에서 만났다. ⓒ최성욱

 

조선 환관들 평균수명 70세…양반보다 최장 20년 더 살아
민 교수 “전립선암 환자들 조사해 현대의학 새 지평 열 것”

[한국대학신문 최성욱 기자] 어린시절 동네 어르신들이 농을 걸어오듯 했던 말이 과학적 사실로 증명됐다면? “그건 아껴야돼. 많이 쓰면 빨리 죽어.” 과학용어로 ‘마모설(Disposable Soma Theory)’이다. 남성의 경우 생식활동을 하는 데 쓰이는 신체의 여러 활동이 인간을 빨리 늙게 만든다는 것. 일찍이 학계에선 정설로 통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노화이론이다.

자칫 야한농담 같은 말의 과학적 근거는 동물실험에서 나왔다. 실제로 쥐의 고환을 잘라내면 정상적인 생식기능이 있는 쥐보다 약 석 달 더 오래 산다는 실험결과가 있다. 쥐의 수명에 영향을 미친 건 고환에서 생성되는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은 노화를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고환을 잘라내는 거세(castration) 자체 보다 테스토스테론의 체내 분비량을 조절하면 수명도 연장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생물학·의과학적 분석이 불가능했던 옛 사람들도 남성이 거세하면 특유의 폭력성이나 성욕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거세가 인간의 수명과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는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서양의 경우 두 가지 상반된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소프라노 소리를 내는 카스트라토나 가톨릭성당의 합창단원들은 청소년기 때 거세를 하는데 이들이 당시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살진 못했다. 반면 20세기 초 미국 캔자스주의 한 정신병원은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고 환자들을 거세했는데 이들은 평균수명보다 14년여 더 살았다.

의료 윤리상 실제로 거세한 남성들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 없었던 탓에 남성 거세와 노화연구는 이처럼 사료(史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서양에서도 두 가지 연구결과가 팽팽히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도 동물처럼 거세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확신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환관들은 남성으로서 생식능력을 잃은 대신 수명 연장을 선물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당대 사람들보다 오래 산 요인으로 충분한 음식 섭취, 규칙적인 생활, 상대적으로 덜한 스트레스 등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최성욱

‘남성 거세와 수명 연장의 상관관계’ 이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는 뜻밖에도 집에서 쉴겸 TV사극을 보고 있던 민경진 인하대 교수(43·노화생물학, 사진)가 풀어냈다. 노화생물학 분야에서 ‘초파리 노화’를 연구해온 민 교수는 TV를 보다 문득 환관(宦官, 내시)이 얼마나 오래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막연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연구는 의외의 곳에서 술술 풀려나갔다. 이 지점은 2만여명에 달했던 중국의 환관과 조선 환관의 가장 큰 차이에 있었다. 바로 혼인이다. 환관들의 혼인을 금지해온 중국과 달리 조선의 환관들은 혼인이 가능했다.

궁형(생식기를 잘라내는 최고형)에 처해진 범죄자나 질병이나 사고로 고환의 기능을 잃은 사람, 궁궐생활로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던 거지 등이 환관이 됐다. 생식능력을 상실한 이들은 양자를 입양하는 방식으로 대를 이어갔다.

혼인이 가능했다는 건 족보가 있다는 말이다. 환관들의 족보는 ‘양세계보(養世系譜)’로 전해지는데 대략 18대에 걸쳐 조선의 환관 가계도가 수록돼 있다. 대조군은 당대 양반으로 잡았다. 왕궁에서 일하고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으며 급여 등 생활수준이 환관과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양세계보에서 추출한 명단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서 역추적했다. 환관 이름을 한명한명 대조해 사서(史書)에 기록된 해에 해당 환관이 살아있었음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한남 연구원, 이철구 고려대 교수(노화생물학)와 함께 꾸린 연구팀은 양세계보에서 자료를 뽑아내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연구결과 환관은 당대의 양반보다 20여년이나 더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16세기 중반~19세기 중반 세 양반가문의 남성들은 평균 51세에서 56세까지 산 반면 비슷한 시기 환관들(81명)의 평균수명은 70세로 나타났다. 100세를 넘긴 환관은 밝혀진 것만해도 3명이다. 양반 평균수명의 2배에 달하는 109세 최고령 환관을 찾아냈을 땐 연구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남성의 생식과 수명의 상관관계를 사람을 통해 증명해낸 건 세계에서 첫 번째 연구였다. 이 같은 1차 연구결과가 발표된 지난해 민 교수는 CNN, ABC, 로이터 등 외신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전화와 이메일은 물론 라디오 인터뷰도 쇄도했다.

‘전립선암에 걸린 환자는 고환을 떼어내야 하는데 이들의 평균수명은 상대적으로 높을까?’ ‘고환이 미성숙해 각종 질병을 앓는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적은데 이들의 생리현상은 어떻게 수명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한국연구재단 ‘모험연구’ 2·3년차 연구를 남겨두고 있는 민 교수가 오는 2015년 4월까지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다. 민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질병치료를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그는 확신에 차 있다. “남성호르몬과 노화의 관계가 확실해졌으니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자칫 생명연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고환의 기능을 상실시키는 불법 시술로 이어지진 않을까 걱정됐다. 민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테스토스테론은 ‘생명연장 호르몬’이 아니에요. 이것이 없으면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고 신진대사에 장애를 일으켜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린 지금도 환관보다 충분히 더 오래 살고 있잖아요.”

▷연구자: 민경진 인하대 교수(43·기초의과학부)
▷주제: 환관은 정말 오래살았을까: 인간 생식과 노화의 상관관계 연구
▷연구기간: 2012년 5월 1일~2015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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