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 외길인생… 현암 최현우의 삶과 교육보국<2> 초지일관 뜻 세운 어린시절

▲ 영주농업중학교 사범과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에 나선 현암(앞줄 외쪽에서 세 번째)

내가 훗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향 영주에 학교를 세워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동량지재를 양성하겠다는 꿈을 초지일관 밀어붙일 수 있게 된 것도 주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의지를 불태운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주변사람들이 나를 일러 인내심과 추진력이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하는 것도 바로 고아나 다름없던 내가 산 넘고 물 건너 보통학교를 통학하면서 길러진 끈기와 강인함 때문이리라.

나는 기미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강압통치와 수탈이 한창 심해지던 1927년 음력 6월 20일 경상북도 영풍군 안정면 상줄리에서 태어났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면서 영주시 풍기읍으로 바뀌었다. 나는 말 그대로 조실부모 했다. 아버지는 내가 백일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내가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친정으로 돌아갔다. 한학자로서 후학들을 가르치시며 지역의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할아버지의 결정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첫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을 여의고 평생 청상과부로 살아가야 할 처지에 놓이자 이를 안쓰럽게 여긴 할아버지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새로운 행복한 인생을 살라”며 단호하게 어머니를 내치셨다(?)고 한다. 한학자인 선비였지만 개화된 분이셨던 것이다.

어느 조부모인들 손자(孫子)에 대한 사랑이 없으련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에 대한 사랑이 유독 지극하셨다. 또한 나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남다른 사랑을 주셨다. 일찍 부모를 여읜 나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틋함 때문이었을까. 조부모님의 살림살이는 계옥지탄(桂玉之嘆)을 면치 못했느니 말 그대로 식량 구하기가 계수나무를 구하듯이 어렵고, 땔감을 구하기가 옥을 구하기만큼이나 어려웠다. 할아버지는 나를 삼십 리나 떨어져 있는 읍내로 진학시켰고 남들에게 초라하게 보이지 않도록 복장도 항상 좋은 옷으로 깔끔하게 입히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듯 나무하러 갈 때도 책을 놓지 않았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할머니의 집안일을 도와드리며 나름 조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했다.

조부는 내게 학문에 뜻을 두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셨다. 할아버지는 향리에서 서당을 개원하여 학동들을 가르치고 계셨기에 나는 일찍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점차 동몽선습, 격몽요결, 명심보감, 맹자, 논어 등을 배우게 되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어린이의 외로운 마음은 배움으로 채워졌고 그 배움은 사유(思惟)의 세계를 넓혀 주었다. 이 덕분에 어린 나이에도 본의 아니게 나는 우주의 운행과 섭리,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인륜과 도덕, 그리고 학문의 진수를 적잖이 알게 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소년이노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니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라”

낭랑한 목소리로 논어를 읽는 소리는 벽촌 시골 서당에서도, 사대부의 사랑채에서도 들리는 소리였다. 논어는 어린 학동이나 나라를 경영하는 원로대신들이 함께 읽고 공부하는 학문이었다. 옛 성현의 말씀을 익히고 깨쳐서 실천하는 것이 배움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던가.

조부는 나라가 왜(倭)에 의해 강압 통치되어 나랏말을 못 쓰게 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가 폭압으로 강요되던 때에도 벽촌에서 서당을 열어 어린 학동들의 정신을 깨우치던 꼿꼿한 절개를 지닌 선비였다.

“대저 사내아이란 어려서부터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 큰 그릇이 되려면 큰 곳에서 배워야한다. 옛 학문만 고집하여 시대를 외면하는 것 또한 배움의 순서가 아니니라.”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개혁적이고 새로운 사고를 지닌 경우가 보통이다. 한학자이면서도 남들보다 앞선 사고를 지니셨던 할아버지는 집근처가 아닌 영주 읍내에 있는 서부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에 나를 입학시키셨다.

읍내 학교까지는 왕복 삼십 리로 어린아이 걸음으로는 족히 4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꼬불꼬불 삼십 리 시골 길을 오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여덟 살 어린아이가 감내하기에는 어른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뻐꾸기, 꿩, 소쩍새 등 산새소리를 벗 삼아 험한 산길을 넘고, 길가에 함초롬히 피어있는 들꽃을 감상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철 따라 변하는 자연은 그 이치를 나도 모르게 온몸으로 깨닫게 하고 자연의 순리가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끼도록 하였다.

당시 비가 많이 오거나 장마가 져 물이 불어나는 날이면 학교를 갈 수 없었다. 도로가 완전히 정비된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얕은 개울에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목조 다리라서 장마만 지면 떠내려갔다. 때문에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 때까지 며칠이건 기다리려야만 했다. 어떤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충만했던 어린 시절, 공부하는 재미도 있었거니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선생님과 즐겁게 떠들며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를 오가기 위해 영주읍 초입에 있는 고개, 나무재 일대의 공동묘지를 지날 때마다 어린 나이임에도 삶과 죽음, 삶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곤 하였다. 아마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또래의 어린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조숙한 정신세계를 지녔지 않았을까 한다.

당시 보통학교를 같이 다녔던 한 동창생들은 “한 갑자(甲子)를 훨씬 넘은 오래전 일이지만 현암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겉으로 비상하거나 남다르게 행동하지는 않았어도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고 평소에 말수가 적었어도 꼭 해야 할 말은 조리있게 일목요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린나이에도 범접하기 어려운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아오키라는 일본인 선생도 현암을 엄청 챙겼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현암은 작은 고추, 특별한 존재였던 거죠”

어린 시절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조부 사망(서부보통학교 4학년 때) 이후 극심한 가난을 겪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가까스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어린나이였지만 할머니를 모시고 가난을 피부로 느끼며 살았기에 직업을 가질 궁리를 하였다. 나는 검사 서기보가 되기로 작정하고 3년 동안 독학으로 형사소송법을 혼자서 공부하였다. 이는 훗날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입학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주위의 도움으로 17살이 되던 해인 1943년에 6년제인 영주농업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가난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즈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면서 온갖 수탈을 자행한 탓에 국토는 피폐해지고 사람들은 헐벗음과 굶주림이 일상화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겪어야 할 가난의 질곡 속에서도 나는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난과 배고픔보다 더한 아픔, 어린나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사별한 슬픔을 겪은 나는 그 질곡의 세월을 묵묵히 공부로 견디며 승화했다.

농업중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지만 그 감격만큼 세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6년제인 중학교 과정에서 사범과가 분리되었다. 나는 선생이 되기로 마음먹고 사범과를 지원했다.

영주농업학교 사범과 동기생 박규옥씨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는 체구도 작고 말수가 적어 학급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씨름을 엄청 잘했고 학급현안에 대해 하도 말을 조리 있게 잘해 별명이 ‘말 잘한다 최현우’ 였지요. 저는 그때부터 현우가 장차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었었지요”

동기생 박씨의 말대로 현암은 경북대 졸업생 때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보국을 실천한 큰 인물이 되었다.

<정리 = 한국대학신문 편집국 기획팀>

*** 이 시리즈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고자 16부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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