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대학설립규제' 아닌 '퇴출경로' 마련에 주력해야

연내폐지 방침에 대학들 '뒷북행정' 비판

[한국대학신문 민현희·이현진·손현경 기자] 부실대학을 양산한 주범으로 비판 받아온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연내 폐지된다. 교육부는 지난 12일 ‘고등교육 종합발전방안(시안)’을 발표하고 일정기준만 충족하면 대학 설립을 인가하는 준칙주의를 폐지해 대학의 신설을 억제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부 방침을 놓고 대학들은 ‘뒷북 행정’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미 준칙주의를 통해 수많은 부실대학을 키워놓고 대학구조조정이 본격화된 지금에서야 이를 폐지하는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말이다. 특히 대학들은 “지금 정부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학 설립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퇴출 경로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4년제 사립대 43% 준칙주의 이후 설립 = 16일 대학가에 따르면 준칙주의는 교원, 교지, 교사, 수익용기본재산 등 4가지 최소 기본요건만 충족하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제도로 1995년 5.31교육개혁조치에 의해 도입돼 1996년 7월부터 17년간 시행돼왔다.

준칙주의에 앞서 시행됐던 인가제는 학생 정원 5000명 이상 규모에 맞는 시설기준을 확보해야만 대학 설립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준칙주의는 소규모 특성화 대학 설립을 유도하기 위해 도입된 취지가 컸다.

그러나 이 제도의 도입으로 대학 설립이 쉬워지자 대학이 급증했고 부실대학이 난무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1996년 264개였던 전국 사립대(전문대학, 대학원대학 포함)의 수는 올해 337개로 73개나 늘었다. 특히 4년제 대학은 109개에서 156개로 증가해 준칙주의 시행 후 설립된 곳이 47개(43%)에 달한다. 대학원대학의 수도 1개에서 42개로 눈에 띄게 늘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준칙주의로 인해 누구나 돈만 있으면 손쉽게 대학을 설립할 수 있게 됐다”며 “이는 명확한 교육철학이나 장기적인 비전이 없이 학생 등록금으로 돈벌이를 하려는 부실대학들이 난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2000년 문을 닫은 광주예술대를 포함해 아시아대(2008년), 명신대(2012년), 성화대학(2012년), 선교청대(2012년), 벽성대학(2012년), 건동대(2012년) 등 폐교가 결정된 7개 대학은 모두 1996년 준칙주의가 도입된 뒤 설립된 대학들이다. 또 지난 4월 자진 폐교 신청을 한 경북외대 역시 준칙주의 시행 이후 문을 열었다.

■ 정부가 부실대학 난립 ‘부채질’ = 눈여겨봐야할 점은 교육부가 준칙주의에 명시된 최소 요건마저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설립 인가를 내준 대학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준칙주의로도 모자라 스스로 부실대학 난립을 부채질한 꼴이다.

대학교육연구소가 지난해 8월 공개한 폐교 대학들에 대한 교육부의 설립 심사 당시 지적사항을 살펴보면 명신대는 교원확보율, 성화대학은 교원확보율·교지확보율·교사확보율에서 ‘불충족’ 판정을 받았다. 또 건동대는 교수진의 전공 합치 기준이 미달해 ‘조건부 충족’ 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설립 심사 3개월 후 모두 개교했다.

아울러 광주예술대·아시아대·선교청대는 설립기준은 충족했으나 △개교 준비를 위한 학생 지원시설 미흡 △이사장이 재정확보와 대학운영 능력에 문제 있어 보임 △도서관 소장 도서 내용과 양이 교수·학습에 도움을 주기에 미흡 등의 지적을 받았다.

준칙주의 시행으로 대학이 우후죽순 늘어난 결과 현재의 대학 입학정원(55만9036명)이 유지될 경우 2018년부터는 입학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생(54만9890명)보다 많아진다.<표 참조> 부실대학을 퇴출하지 않으면 대학의 생존 자체가 위급해지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정부가 최근 몇 년 전부터 대학구조조정에 강도 높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이유다.

[표]대학진학자 예측 시계열 분석
(단위: 명, 자료: 교육부)

연 도

2013년

2018년

2023년

학령 인구(A)

687,455

598,296

433,032

고교 졸업생(B)

631,835

549,890

397,998

입학정원(C)

559,036

559,036

559,036

초과정원(B-C)

72,799

-9,146

-161,038

■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비판 봇물 = 그동안 대학가에서는 준칙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때문에 준칙주의를 폐지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자 대학 관계자들은 “이제라도 제도가 폐지돼 다행”이라면서도 “정부가 뒷북 행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준칙주의 도입 방침 발표 당시부터 이를 반대해온 대학교육연구소 박거용 소장은 “처음부터 준칙주의로 인해 대학의 수가 급증하고 부실대학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며 “이제야 준칙주의를 폐지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 다름없어 안타깝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민기 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 이사장은 “이미 수많은 부실대학이 나왔고 이제 학생 수 감소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수요는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지금에야 준칙주의를 폐지하는 것은 유명무실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달 현재 4년제 대학 신설 신청은 한 건도 없으며 전문대학, 대학원대학 설립 신청만 6건 있을 뿐이다.

정부의 대학구조조정을 둘러싼 불만도 여전하다. 한 지방대 총장은 “정부가 준칙주의를 도입해 부실대학을 양산해 놓고 문제가 되자 이를 퇴출하려고 한다. 잘못의 원인은 정부가 제공해놓고 책임은 대학에게 전가하는 꼴”이라며 “부실대학 퇴출을 위한 평가 기준도 획일적이어서 준칙주의와 상관없이 설립된 내실 있는 지방대들까지 고통 받고 있다”고 밝혔다.

■ “구체적인 퇴로 마련에 집중해야” = 대학 관계자들은 지금 정부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학 설립이 아닌 구체적인 퇴출 경로 마련이라고 강조한다. 대학이 자발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퇴로를 열어주는 실효성 있는 출구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뜻이다.

현행법은 대학을 스스로 정리하려는 학교법인에게 잔여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는 대학을 폐교하려면 설립 당시 출연한 재산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여서 대학의 자발적인 해산을 막는 장애물이 돼왔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고등교육 종합발전방안’에서 해산하는 대학법인이 보유한 잔여재산 일부를 평생교육기관, 사회복지법인 등 공익법인에 출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학들의 ‘명예로운 퇴진’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실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게 대학들의 의견이다. 송영식 한국대학법인협의회 사무총장은 “잔여재산 일부를 공익법인으로 출연하도록 규정해 명예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정부가 다양하고 구체적인 퇴로와 보상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 한 자진 폐교하는 대학은 희박할 것이고 악순환만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선 세한대 전 교무처장은 “교육부는 퇴출 대학과 관련한 법률적인 안전장치 마련에 힘써야 한다”며 “해당 대학의 학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시설 등 인프라가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세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준칙주의 시행과 뒤늦은 폐지에 대한 정부의 반성과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지방대 보직교수는 “부실대학 퇴출로 인해 너무나 많은 대학 구성원이 고통 받고 있다. 정부는 준칙주의를 폐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이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며 “특히 준칙주의 도입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다시는 교육정책 결정에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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