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 외길인생… 현암 최현우의 삶과 교육보국<3> 선생님에서 대학생으로

▲ 소수사원 설립 이후 영주는 이황 선생을 필두로 영남학파의 학문이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 소수서원의 학맥을 이을 고등교육기관이 하나없는 교육 불모지가 됐다. 현암선생은 이러한 사실에 아쉬움을 가지고 영주에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추진하게 됐다.

나는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가슴속에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고향 영주 지역의 자랑스러운 소수서원을 널리 알려 우리 교육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543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은 미국의 하버드대학(1636년)보다 93년이나 앞섰고 일본을 대표하는 도쿄대학(1877년)보다는 334년을 앞선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수서원의 전통을 이어받아 미국이나 일본처럼 좀 더 빨리 근대교육을 시행했더라면 임진왜란이나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들어선 소수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자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기존 지방 관립 교육기관인 향교(鄕校)를 뛰어넘는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수하는 지방 사립대학인 셈이다. 이 지역 출신으로 최초의 주자학자로 알려진 문성공 안향(安珦) 선생이 유배 시절 머물렀던 자리에 1543년 세워진 서원은 마을의 이름을 따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이 명종에게서 현판을 하사받아 지금의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내 나이 올해로 86세. 나의 삶을 4등분한다면 그 첫 번째 등분은 참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던 불행한 시절이다. 그 당시 같은 시대를 살던 모든 이가 그러하였겠지만 내 어린 시절은 나라 전체적으로 암울함 그 자체였다. 꿈 많은 어린 시절을 일본의 지배하에서 보내야 했던 나는 청운의 꿈을 꾸던 젊은 시절을 6·25전쟁이라는 참혹함 속에서 보내야 했다. 나라의 운명이 남의 손에 좌지우지되며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위기에 처하는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교육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힘이 없는 나라는 빼앗기게 되고 침략당하고 만다는 현실을 실감했다. 힘이 있는 강인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교육보국(敎育報國), 바로 그것이었다. 교육만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49년 영주농업중학교 사범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나는 여름방학을 눈앞에 둔 7월 봉화군 재산면에 있는 재산국민학교(현 초등학교}로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았다. 당시 중학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친 것과 같은 6년제로 사범과를 나오면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내 나이 22세 때였다.재산면은 영주보다 훨씬 낙후된 궁벽한 산골 벽촌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1951년 3월까지 1년 9개월 동안 교사로 근무했다. 나는 초임지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으나 내 마음속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더 내적 충실을 기하고픈 지식욕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5학년 담임을 맡아 의욕적으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부족하고 어렵던 시절 궁벽한 산촌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란 열정과 노력뿐이었다. 나는 학급신문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아이들이 쓴 글 중에서 잘 쓴 것을 골라 편집을 했다.

제자이던 김시섭씨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65년 전의 일인데 그때 기억이 다 나니더. 현암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처음 오셔서 5학년인 우리 반 담임을 맡았니더. 동글동글한 얼굴에 키가 조매한 양반이 책을 항상 옆구리에 끼고 얼매나 열심히 우리를 가르치는동 어린 마음에도 참맬로 기분이 좋았디더.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우리 반 아이들이 쓴 글을 모아 쪼매한 학급신문을 만들어줬는데 정말 신기했니더. 기름 맥인 원지에 ‘가리방’이라는 철필로 글을 써갖고 등사기에 종이 갈고 쓱쓱 밀어서 신문을 만드는데 울매나 신기하는동 삥 둘러서서 구경을 했시더.”

한번은 학급신문에 도지사의 글을 실어 봉화군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도지사에게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을 써달라며 원고청탁을 했더니 기꺼이 원고를 보내왔다. 그런데 글이 너무 길어 학급신문에 실을 수가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도지사님의 글이니 절대 줄여서는 안 된다”고 우겼다. 하지만 나는 “신문제작은 편집자의 고유권한이니 간섭하지 마시라”고 거절한 후 원고내용이 훼손되지 않게 줄여서 신문에 실었다. 일개 시골 초등학교의 학급신문에 도지사의 글이 실리다니…그것을 추진한 나 스스로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해가 바뀌어 새해가 되면서 나는 6학년 담임을 맡았고 학급신문은 계속 만들어 아이들에게 학교와 학업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밤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문을 연 야간 공민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내가 봉화의 재산국민학교에 부임한 다음 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포성이 전 국토를 뒤흔들었다. 온 국민이 전쟁의 참화에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포연 속에서도 재산국민학교의 수업은 이어졌지만 가족들은 극도의 불안과 불편 속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내야 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방학을 맞아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손자 내외와 증손녀가 무사히 돌아오자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셨다.

나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보고 깊은 절망을 느꼈다.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배움에 대한 갈증은 더욱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했다.나는 전란의 와중 속에 절망에 빠져 있는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먼 미래를 향한 자아실현을 위해서 대학을 다녀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과 대학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눈보라 치는 어느 겨울날 대학교 교정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경북대학교 교정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교정을 둘러보고 학교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마침 내가 대학을 방문한 날이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비록 입학원서 접수는 안 했지만 저도 한번 시험을 치러보고 싶습니다.” 불현듯 나도 다른 수험생들과 어울려 시험을 쳐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솟구쳐 직원에게 사정했다. 그 직원은 친절하게도 총장님께 여쭤보겠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잠시 후 나는 응시생들과 다른 교실에서 홀로 시험을 치렀다. 나는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답안지를 작성하여 제출한 뒤 시험기회를 준 대학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성적이 우수해서 특별히 입학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법학과 합격통지서였다.

그러나 나의 경제적 사정은 대학을 다닐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더구나 처와 자식도 있지 않은가. 총장님께 입학을 허가한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며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입학을 포기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총장님은 영풍군수에게 “최군의 입학시험 성적이 아주 우수하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입학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니 군수가 나서서 군 장학생으로 지정해 학비를 지원하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특별지원 요청을 했다. 군수님은 “그런 공부 잘하는 학생이 우리 군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 군의 자랑”이라며 기꺼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총장님은 군(郡)의 장학금을 받는 대가로 한 가지 조건을 들어달라고 요청하셨다. 학생을 가르친 경험이 있으니 장학금을 받는 대신 대학교 인근 학교에서 야간에 아이들을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밤에는 대학교 인근에 있는 야간 계문중학교의 교감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경북대학교 법학과 입학은 나의 삶의 가장 큰 분수령이 되었다. 궁핍의 나락을 헤매는 가정형편과 전쟁의 포성이 국토를 뒤흔들고 있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대학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절망에 빠진 한 청년이 현실극복의 지향점을 먼 미래에 두고 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대구로 나가서 시작된 대학생활은 새로운 고난과 시련의 시작이었다.

<정리= 한국대학신문 편집국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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