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 외길인생… 현암 최현우의 삶과 교육보국<4> 경북공고 설립

*** 최현우 현암학원 이사장이 최근 건강이 악화되어 지난 1일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고인은 1927년 8월 20일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교육보국(敎育報國)의 가치를 깨닫고 1954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교육계에 투신해 1955년부터 경북공고, 경구중학교, 경북전문대학교, 동양대학교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이바지 해왔다. 고인은 국민교육유공자로 추천받아 1993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했으며 유족으로는 미망인 손정자여사, 장남인 최성해 동양대 총장, 최종해 동양종합건설 대표이사, 최재혁 경북전문대학 총장, 최은임, 최은미, 최혜경, 최지영씨 등 3남4녀가 있다. 본지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참 교육자’ 를 발굴, 소개하는 기획시리즈를 연재중이다. 이번 시리즈의 주인공인 현암 이사장의 갑작스런 부고를 접하고, 그는 영면했지만 교육발전에 일생을 바친 그의 유지를 받들어 연재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앞으로 연재될 내용은 고인의 생전 인터뷰와 현암학원 관계자들의 증언, 기타 관련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유지가 빛바래지 않도록 이번 기획시리즈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한평생을 후학 양성에 몸바티고 영면한 현암의 영결식이 지난 5일 유족과 대학 구성원 등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동양대 학군단이 선도하는 운구행렬 뒤로 유족이 뒤따르고 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주장하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현암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보국(敎育保國)에 꿈이 있었다. 더욱이 경북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1년 9개월 동안 교사생활을 한 경험도 있다. 경북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의 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꿈은 점차 확고해졌다.

당시 그가 야간교사 생활을 하던 학교는 훗날 쌍용그룹이라는 굴지의 재벌회사 총수가 된 김성곤 씨가 세운 계문중학교였다. 한국전쟁 중이라 정식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닌데도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학생들이 야간학교를 다닐 정도로 우리나라의 향학열은 대단했다.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갔지만 다행히 대구는 격전을 치르지 않아 섬유공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섬유공업이 산업기반인 대구에 어느 대학에도, 어느 고등학교에도 섬유관련 학과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1954년 5월 현암은 대구시 칠성동에 있는 경상북도직물공업조합을 찾아가 최익성 당시 이사장과 배석한 3명의 이사에게 조합을 방문한 목적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경북대학교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청년의 계획을 듣고 난 최 이사장과 이사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공업고등학교 설립이라니. 그들이 보기에 스물일곱 청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창한 포부였을 것이다. 더욱이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죽고, 국토는 유린되고 기간시설마저 파괴된 이 어려운 시기에 학교를 설립하겠다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침묵 속에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는 학교 설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신념에 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일제가 36년 동안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침탈해가고 껍데기만 남겨놓았습니다. 거기에다 3년 동안의 전쟁은 그나마 남아 있는 것마저 모조리 파괴해버렸습니다. 우리 대구는 다른 도시에 비해 경제기반이 취약합니다. 서울은 제쳐두고라도 부산·인천·마산 등 다른 도시는 그나마 항구가 있어서 대구보다는 경제발전 여건이 나은 편입니다. 우리 대구는 섬유산업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습니다. 우리 지역의 전통적인 섬유산업을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대구에는 직물공장이 많았고 경북대학교·대구대학·청구대학·대구공고 등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런데도 대학교나 고등학교에 섬유관련 학과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공업고등학교 설립에 도움을 줄 것을 부탁했다. 하루 끼니도 해결하기 힘든 시기에 먼 훗날을 내다본 계획을 세우고 학교 설립에 관한 마스터플랜을 설명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로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학교 설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현암의 설득에 경북직물조합 이사진은 마침내 마음을 열었다. 조합장과 이사들은 그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들의 약속은 당장 학교 설립에 필요한 부지나 자금이 아니라 개교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조합 사무실을 나서는 현암의 마음은 든든했고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학교 설립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이사진의 약속은 정신적으로 많은 위안이 되었다. 더구나 학교 설립 후에 배출될 졸업생의 취업을 적극적으로 주선하겠다는 약속은 무엇보다 더 큰 힘이 되었다.

그는 계문중학교 시설에 ‘경북기술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을 모집했다. 물론 야간이었다. 그때 ‘전시학생증’이라는 게 발급되어 재학 중인 학생은 자동으로 징집연기가 되었다. 그는 학교 설립 준비를 하면서 경상북도 학무과를 찾아가 직원을 논리적으로 설득한 끝에 전시학생증을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다. 학생모집은 순조로웠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순수한 열정으로 온 학생도 많았지만 전시학생증이 탐나서 온 학생도 적지 않았다. 학교는 순조롭게 운영되었으나 중학교 시설에 고등학교가 더부살이를 하는 편이어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경북대학교에서 영어강의를 하고 있는 미8군 소속 육군 중령에게 군사원조자재의 지원을 부탁했다.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데 미8군에서 요구하는 서류 중 예금잔고증명서가 있었다. 신입생들로부터 받은 1기분 공납금이 있어서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막상 예금잔고증명서를 떼려 하니 잔고가 비어 있었다. 김성곤 씨의 처남인 학교 교감이 자기가 운영하는 공장의 운영자금을 빼돌린 것이다. 그는 학교 공금을 사사로이 유용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즉각 변제하라고 다그쳤다. 교감은 나이도 어린 그가 학생 신분인 데다 자신은 재단의 실권자라는 점을 과시하며 그의 요구를 묵살하다시피 했다. 그는 분노하여 학교의 공금횡령에 관한 내용을 언론에 제보했고 대구신문에 큼지막하게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사내용은 공금횡령에 관한 것보다 현암이 학생 신분으로 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여 대구의 섬유산업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양성한다는 내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공금횡령이 기사화되자 교감은 상당액의 돈을 들고 와서 타협을 시도했다. 그 돈을 개인적으로 받고 없던 일로 덮어두자는 의도였다. 공의를 저버린 행위에 그는 교무실을 박차고 나와 교감이 준 돈뭉치를 허공에 던져버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경북대학교 전체로 퍼졌고 당시 고병관 총장은 그를 불러 의기 넘치는 행동을 치하하면서 학교를 설립해보라고 격려했다. 당시 재구(在邱)영주학우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학우회에 학교 설립 포부를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다.

1954년 6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4학년이던 외육촌 동생 안재호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훗날 그와 육영의 동지로 평생 일하게 된 학우회 총무 홍대선이 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주변 친척들과 지인,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여러 동지와 함께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마침내 학교 설립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홍대선의 도움으로 군부대로 쓰던 땅을 학교 부지로 빌려 쓰게 되고 책상과 걸상을 외당숙인 권태업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됨으로써 그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55년 2월 2일. 마침내 문교부로부터 학교설립 인가가 났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지난해 여름부터 안재호와 서류를 준비하느라 손가락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고생을 한 지 꼬박 반년 만이다. ‘경북고등기술학교’ 설립인가증을 몇 번이고 보고 다시 확인해보고 가슴에 안아도 보았다.

같은 해 4월 20일 대구시 남산동 657번지. 시골동네 공터 정도에 불과한 넓이의 운동장 안쪽에는 붉은 벽돌 건물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교남학교(지금의 대륜중고등학교)가 개교해서 옮겨갔고 광복 후에는 능인, 대성학교가 차례로 개교한 뒤 이사 갔다. 교사가 오래돼 지붕은 군데군데 뚫려서 틈새로 햇살이 비쳤고 바닥은 맨흙이지만 이 자리는 대구 사립학교의 메카나 다름없는 곳이다. 한창 봄이 무르익고 있을 때 그는 부푼 꿈을 안은 367명의 푸르고 싱싱한 젊은이들을 맞아 이 자그마한 운동장에서 개교식을 겸한 입학식을 치렀다. 이 중 60여명은 말이 신입생이지, 다른 학교에서 1학년 과정을 마친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학교시설이나 규칙이 제대로 잡혀 있질 않아 학교를 다니다 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학교로 어렵지 않게 전학을 가기도 했다. 그는 경상북도 내에서 유일한 문교부 인가 기술고등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 정리=한국대학신문 편집국 기획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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