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 한국대학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아 국내 대학 연구자들의 연구환경을 돌아보면서 △우수한 연구 △참신한 연구 △흥미로운 주제를 가진 연구 등을 발굴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지원 성과와 정보를 공유하는 취지에서 연속기획 ‘괴짜과학자들의 위험한 연구’를 마련했다. 자기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에 뛰어든 학자들의 파격적인 상상력을 뒤쫓아 가보자.

 

▲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사진)가 자바긴팔원숭이 연구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다. 지난 2006년 연구차 자바섬을 방문한 김산하 연구원이 산을 지나다 자바긴팔원숭이를 발견했다. 현지에선 독일 연구팀이 연구하다가 포기한 것 같다고 했다. 영장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이 대답을 듣는 순간부터 시간이 열 배는 빠르게 흐른다고 한다. 누가 먼저 깃발을 꽂느냐, 깃발싸움이다. 김 박사는 다급하게 최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 교수는 “어영부영할 일 없다. 일단 말뚝부터 박자”며 비행기 표를 끊었다. 지난 10일 최 교수 연구실에서 ‘자바섬 6년’의 탐험기를 들었다. ⓒ최성욱

자바섬 먼저 들어온 해외학자들, 최 교수에 자문·허락
야생영장류 연구의 관건은 기다림 … 장기 지원 절실

[한국대학신문 최성욱 기자] “10시 방향! 10시 방향!”

자바긴팔원숭이(Hylobates moloch, 자바원숭이)가 나타났다. 연구원들은 숨을 한번 들이키고 있는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자바원숭이 가족이 30미터 상공에서 무화과나무숲을 유영(游泳)하듯 헤집고 다녔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감상할 틈이 없다. 길목을 잡으려면 그들보다 먼저 뛰어야한다. 슉슉슉 샤악.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고개를 든 채 숲속을 질주하던 연구원들은 무릎이 성할 날이 없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이들의 숨막히는 추격전은 밀림의 적막을 깨뜨렸다. 연구원들은 나무를 타는 자바원숭이의 재빠른 몸놀림을 ‘하늘을 나는 새’에 비유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구눙할리문살락(Gunung Halimun-Salak)국립공원. 자카르타 공항에서 자동차로 5시간을 내려가면 이 국립공원이 나온다. 입구에서 돌길을 1시간 가량 꿀렁꿀렁 넘어가다 보면 캠프가 있다. 캠프에는 연구원 2명과 현지 조수 3명으로 꾸려진 연구팀이 자바원숭이와 생활하고 있다. 다 합해 열 집도 안되는 작은 산골짜기 마을의 이장집에 캠프를 차린 지 6년째. 노트북으로 자료를 찾거나 보고할 때 간간이 필요한 전기는 물레방아를 돌려서 자체 발전한다.

지난 2007년부터 자바원숭이 생태 연구를 시작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59·에코과학부, 사진)는 “자바원숭이를 발견한 것도 그렇지만, 공항에서 하루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곳에서 영장류를 연구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며 으쓱해했다. 2006년 김산하 연구원이 연구차 이곳을 지나다 우연히 자바원숭이를 발견하면서 연구는 시작됐다.

기적은 또 있었다. 자바원숭이와 안면을 트는(?) 일. 야생영장류 연구의 성패는 ‘친숙해지기’에서 판명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년을 숲속에서 살다시피해도 야생동물이 마음을 열지 않아 짐을 싼 연구팀이 비일비재하다. 연구소 한켠에 동물을 가둬놓고 갖가지 상황을 던져준 후 행동을 연구하는 일반적인 동물실험과 달리 야생영장류 연구는 기초·비교데이터가 없다. 그저 야생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동물들이 반복적으로 취하는 행동 패턴을 읽어내는 게 연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긴팔원숭이의 경우 친숙해지는 데 1년여 걸릴 수 있는데 최 교수 연구팀은 6개월 만에 성공했다. 자바원숭이 다섯 가족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중 세 가족을 집중 연구했다. 최 교수는 “연구라 해봐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인데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최 교수와 연구원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자바원숭이들을 쫓아다녔다. 연구진들은 자바원숭이가 사람처럼 일부일처제를 하고, 한 가족이 경복궁 면적보다 더 넓은 36헥타아르의 거리를 오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좋아하는 먹이를 골라서 먹고 활동 범위도 이에 맞춰 계획적으로 짠다는 것도 새롭게 발견했다. 암수 부부가 소리를 질러서 의사소통(듀엣)을 하는 여타 긴팔원숭이와 달리 자바원숭이는 주로 암컷만 소리를 낸다는 건 연구팀의 가장 큰 성과다.

학계는 과거 원숭이로부터 유인원이 분화돼 나올 때 유인원에 가장 가까운 영장류로 긴팔원숭이를 지목하고 있다.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밀림에 총 17종이 살고 있다. 흰손긴팔원숭이를 제외하면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긴팔원숭이(gibbon)는 이름만 원숭이일 뿐 고릴라·침팬지·우랑우탄과 함께 유인원에 속한다. 최 교수가 자바원숭이 연구에 뛰어든 이유다. “21세기 들어 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인간보다 덜 진화된 영장류의 인지·행동을 연구하다보면 인간의 진화를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요?”

 

▲ 최재천 교수가 자바긴팔원숭이를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있다. 사진제공: 최재천 교수

야생영장류 연구는 인간 진화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독일·네덜란드·일본 등 전세계 학자들이 일찍부터 뛰어들었다. 분명한 사실은 야생영장류 연구의 열쇠는 ‘시간’에 있다는 점이다. 최 교수도 “현지에서 며칠 잠복하면서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면 되는 간단한 연구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영국의 제인 구달 박사조차 아프리카에서 보낸 6개월을 “산꼭대기에서 망원경으로 침팬지의 형체를 봤을 뿐”이라고 했을 정도다. 구달 박사가 털어놓은 이 한 마디는 야생영장류 연구에 뛰어든 후발연구자들에겐 예외없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자조였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이처럼 야생영장류 연구는 6개월~1년짜리 단기프로젝트에 지원이 몰려있는 국내 연구풍토에선 시도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최 교수가 6년째 현지 캠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한국연구재단의 ‘모험연구’와 기업체 지원 등에 힘입은 때문이다. 최 교수는 야생영장류 연구에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를 다소 독특한 관점에서 설명했다.

“생물학자를 제외한 모든 학자들은 단 한 종(種)의 동물을 연구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인간)죠. 법학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계약관계를, 경제학은 물물교환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몇 천년이나 연구했지만 ‘인간이 무엇인가’에 답이 있나요? 저 같은 생물학자들은 인간과는 다른 종(자바긴팔원숭이)을 연구할 뿐이에요. 1년 연구비 주고 논문 내놓으라고 하는 게 무리일 수 밖에 없지요.”

인간 연구와 비교하면서 최 교수는 “나에게 1천년을 달라”고 외쳤다. 그만큼 이 연구에 ‘묻지마 투자(지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최 교수는 자바섬에 들어간 6년 동안 자바원숭이에 관한 논문을 단 2편밖에(?) 쓰지 못했다. 논문 편수는 적지만 자바섬에 먼저 발을 들였던 독일 등 해외학자들도 자바원숭이 연구에 관한 한 최 교수 연구팀에 자문과 (학술탐사)허락을 받고 있을 만큼 독자적인 연구영역을 구축했다.

최 교수는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아서 연구라는 걸 하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주제더라. 어쩔 수 없다”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은 여느 생물학자와 다르지 않았다. 막연히 인간에 대한 도전도 탐구도 아닌,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최 교수는 “동물의 인지와 행동을 연구하면서 차츰 자연을 알아가는 사람일 뿐”이라며 거듭 몸을 숙였다.

▷연구자: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59세·에코과학부)
▷주제: 자바 긴팔원숭이의 일부일처제 사회구조와 암컷의 번식체계
▷연구기간: 2010년 5월 1일~2013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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