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 외길인생… 현암 최현우의 삶과 교육보국<6> 인재육성을 위해

직업 인성 교육의 고등교육기관 '경북전문대학' 터전 닦아
열악한 여건 발품 팔아가며 극복 … 전공분야 석학들 영업
 

*** 본지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는 기획시리즈를 연재중이다. 이번 시리즈의 주인공인 현암 이사장은 지난 9월 1일 숙환으로 영면했지만 교육발전에 일생을 바친 그의 유지를 받들어 연재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앞으로 총 8회에 걸쳐 연재될 내용은 고인의 생전 인터뷰와 유족, 현암학원 관계자들의 증언, 기타 관련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다. <편집자 주>

영주는 본래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었다. 지금도 곳곳에서 학문숭상을 느낄 수 있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지리적으로 경북 최북단에 위치한 영주는 소백산 산록 고원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2대 동맥의 하나인 중앙선과 영동선, 경북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운수·판매·금융업이 발달하였고, 화엄의 종찰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유교문화의 효시인 소수서원, 안축의 ‘죽계별곡’ 배경인 죽계구곡 등 많은 전통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주는 특히 예로부터 선비의 정신과 숨결이 살이 숨 쉬는 선비의 고장으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퇴계 이황은 영주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영주 고을이 소백산 남쪽에 위치하여 그 땅이 신령스럽고 풍속이 아름다워 세상에서는 인재의 숲이라 일컫고 있다. 이곳 풍속이 문예를 숭상하고 여럿이 함께 모여 학문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과거를 보려고 글방이나 절에서 글공부하는 선비들이 많아 온 군내의 선비가 다 모여들었다.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책을 끼고 오는 자도 많았으나 모두 싫어하지 않고 관청에서 비용을 대주어 한 해도 빠뜨린 적 없이 이어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지금도 매년 봄이면 영주에서는 ‘선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고고한 선비정신은 지금까지도 영주 사람들이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1960년대 시작된 근대화를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변방지역인 영주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교통의 요충지로서 파생된 영주의 발전은 그 속도가 빨랐다.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발전으로 인한 양적인 팽창 속에 소외되기 쉬운 정신적·문화적 낙후와 더불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인재양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은 단순한 기술인을 배출하기 위한 실업계 고등학교의 탄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교육과 인성교육, 전문교육을 병행하는 고등교육기관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때 직업교육의 선봉에 서서 지역사회의 발전을 통한 국가경제발전, 그리고 다가올 세계 경제의 주축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사명감을 가졌고, 그 결과 영주에 1972년 경북전문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경북전문대학교(옛 영주전문학교) 설립은 국가가 필요로 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인력의 양성, 그리고 현암이 평소에 꿈꾸어왔던 교육보국을 실현하기 위한 잰걸음이었다. 경북전문대학교가 터를 잡은 자리는 옛날 서원이 자리 잡고 있던 터로 서원은 일찌감치 없어지고 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는 허름한 집 몇 채, 소나무 몇 그루, 그리고 풀이 우거진 그야말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옛 서원 터에 경북전문대학교가 새롭게 자리를 잡았으니 배움의 터전으로서는 명당 중의 명당이 아닐 수 없었다.

▲ 경북전문대학교 본관 1층의 골조공사(1971년 6월 1일)

학교건물도 세워졌고 학생들도 모집정원을 초과할 정도로 지원하였으나 학생을 가르칠 우수한 교수 확보가 관건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구에서 영주까지 오려면 차량으로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이 오지로 유능한 교수들을 초빙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육의 주체는 선생이고 학교의 주체는 학생이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경북공고의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신문광고를 내 실력 있는 교사들을 채용하지 않았던가. 그는 지리적 여건이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의 주체인 유능한 교수진 영입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현암은 발품을 팔아가며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 여덟 분을 겸임교수로 초빙했다. 그분들은 각 전공분야에서 실력으로 명성을 떨치던 석학들이었다. 그중에는 경북대학교 동기들도 있었고 대구에서 교분을 쌓은 교수들도 있었다. 그는 여덟 명 교수들의 강의시간을 확인한 후 강의가 없는 요일에 맞추어 경북전문대학교의 강의를 짰다. 그리고 대구에서 영주까지 오가는 교통편은 차량을 별도로 마련해서 먼저 와서 강의를 마친 교수를 대구까지 모셔다 드리고 바로 다음 강의를 할 교수를 모시고 오는 방법을 택했다.

영남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총장을 지낸 김기택 박사는 현암이 경북공고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학원에 등록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후일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한 현암이 경제학을 택하기에 속으로 의아했는데 학교를 운영하려면 법학보다 경제학이 더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경북전문대학교 교수진이 부족하니 강의 좀 해달라는 현암의 부탁에 “향리의 젊은이들 앞길을 열어주려고 애쓰는 현암의 열정에 감동되어 강의를 안 해줄 수가 없다”며 강의를 약속했다고 말했다.

경북공고 시절로 돌아가보자. 우여곡절 끝에 보잘것없는 교사(校舍)에서 개교는 했지만 학교 겉모습과는 달리 학교 속은 알찼다고 현암은 자부했다. 학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최우선이고 변할 수 없는 절대명제가 아닌가.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만 학생들이 올 테고 그렇게 되어야만 학교가 발전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력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문에다 교사를 초빙한다는 광고를 큼지막하게 냈다. 그 당시 일간신문에 교사모집광고를 낸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요즘도 간혹 언론에 오르는 사례도 있지만 당시 사립학교에서의 교사채용은 재단에서 청탁을 받고 결정하거나 그 밖에 알음알음으로 적당히 채용해온 것이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그는 실력 있는 교사를 선발하기 위해 인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종합평가를 내린 후 채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교사 채용에 관한 한 사사로움을 떠나 객관적으로 유능한 선생을 선발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 원칙은 변함없이 이어져 현재 경북전문대학교와 동양대학교의 교수 임용 시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시행되고 있다. 아무튼 공정한 심사를 거쳐 교사를 채용한다는 소문이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알려지자 일류대를 나온 실력 있는 교사가 많이 찾아오게 되고 교사진 수준은 대구 어느 학교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일생의 마지막 꿈이자 목표인 고향에 4년제 대학 설립을 1994년 이루게 된다. 공무원 사관학교라고 불리는 동양대학교. 그는 동양대학교 캠퍼스 부지를 고르는 데도 많은 품을 팔았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 교촌동 1번지 일대에 교지를 확보하기까지 그는 오랜 기간 영주 일대의 산야를 누비고 다녔다. 등산화를 신고 바지 끝은 양말 속에 넣은 채 점퍼를 입고 다녔다. 겨울철에는 두툼한 등산모, 여름철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영주 외곽지대의 산야를 구석구석 수도 없이 답사하였다. 그의 살아생전 마지막이자 최대의 배움터를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동양대학교의 터를 잡고 학교 설립인가를 위해서도 뛰어다녔지만 그에 못지않게 후학양성을 책임질 교수진 확보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암은 교사나 교수 채용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이나 인맥 등은 철저히 무시하고 오직 인사위원회의 공정한 심사를 거쳐 결정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사회의 경험 있는 중진 인사를 과감히 모셔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공자가 인생삼락 중에서 영재를 키우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듯이 그 역시 인재를 키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러한 점 때문에 육영 외길을 50년 동안 쉼 없이 걸어온 것 아닌가.현암이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교육 보국을 실천하고자 한길로 매진하여 몰입하니 오지인 영주에 경북전문대학교와 공무원 사관학교라고 불리는 동양대학교를 개교하고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리=한국대학신문 편집국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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