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 최현우의 사람과 교육보국(8) 교육의 새지평을 열다<마지막회>

*** 본지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는 기획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이번 시리즈의 주인공인 현암 이사장은 지난 9월 1일 숙환으로 영면했지만 교육발전에 일생을 바친 그의 유지를 받들어 총 8회에 걸쳐 연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연재된 내용은 고인의 생전 인터뷰와 유족, 현암학원 관계자들의 증언, 기타 관련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고인이 평생 교육에 바친 열정에 경외를 표하고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편집자 주>

소수서원 계승 표방하며 참인재 양성
동양대학교 '공무원 사관학교'로 명성

중국 고전 <관자(管子)>에 “일년지계 막여수곡(一年之計 莫如樹穀) 십년지계 막여수목(十年之計 莫如樹木) 백년지계 막여수인(百年之計 莫如樹人)”이라는 말이 나온다. 곡식을 심으면 1년 후 수확하고 나무를 심으면 10년 후 결실을 맺지만 사람을 가르치면 백년 후가 든든하다는 뜻이다.

현암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새 시대를 이끌어갈 디지털 선비로 길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디지털 선비. 다소 생소해 보이지만 디지털시대의 실용성과 과학적 사고를 함양하고 한국 정신의 본질인 선비정신과 전통의 창조성을 계승하는 한편 개방성·세계성·사회성·문화성을 고루 갖춘 인재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그러한 인재를 키우는 것을 수도권이 아닌 자기 고향 영주에서 실행하기로 하고 4년제 대학교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동양대학교다.

캠퍼스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 동양대로 145 일대 39만6694㎡(12만여 평)에 조성됐다. 동양대 정문에서 약간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왼쪽으로 본관과 이공계 강의실, 기숙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대학원 건물, 인문사회과학관, 창업보육센터 등이 있다. 중앙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 지난 9월 1일 숙환으로 영면한 현암 최현우 이사장의 빈소에 장남 최성해 동양대 총장이 교육발전에 일생을 바친 선친의 명복을 빌며 유지를 받들어 대학교를 발전시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경사진 도로의 고개턱에 이르면 왼쪽에 수령 500년이 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그 옆으로 건평이 330㎡(100평)나 되는 큰 한옥이 있다. 동남향으로 좌향(坐向)을 잡고 멀리 옥녀봉을 마주보고 있는 건물의 당호는 ‘현암정사(玄巖精舍)’다. 현암은 학생들이 실사구시를 추구하되 온고지신의 자세로 학업에 임하는 선비정신을 함양하는 장소(아고라)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현암정사라 지어 붙였다.

정사(精舍)란 정신을 수양하는 곳, 또는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을 일컫는다. 그는 동양대가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사립학교인 소수서원의 학풍 계승을 표방하며 참된 인간성이 바탕이 된 첨단 기술인력 양성에 교육의 목적을 두도록 했다. 특히 학생들에게 고도의 산업화·정보화 사회에서 소홀하기 쉬운 참된 인성을 겸비하도록 하는 취지에서 인성교육 우선정책을 설정, 추진하도록 하였다.

현암정사는 바로 이러한 대학의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대적 과제와 지역적 특성을 기반으로 인성-지식-문화의 연계를 통해 인성교육을 강화, 확산하고자 하는 차별화된 교육 및 연구시설로서 전통한옥으로 건축했다. 이에 따라 현암정사는 재학생 및 청소년 인성교육장, 외국인 한국전통문화 체험 교육장, 관례(전통 성인식) 프로그램 교육장, 전통문화, 역사교육 학술회의장 등 인성과 전문성을 갖춘 디지털 선비 육성을 위한 체험교육장으로서 활용되도록 하였다. 현암정사에서는 지난 1995년부터 매년 재학생을 대상으로 전통관례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년례를 통해 실제 학생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하는 한편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겪게 되는 슬럼프 등에 좋은 자극을 받기도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가 또 하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학자수(學者樹)다. 그는 동양대를 세울 때 이 대학의 설립 이념인 선비정신이 캠퍼스 곳곳에 고스란히 반영되도록 적잖이 신경을 썼다. 캠퍼스 조경수 가운데 유달리 소나무가 많이 눈에 띄는데 여기에 전통 선비정신을 잇고자 하는 그의 숨은 의도가 깃들어 있다. 소수서원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소수서원과 동양대의 공통점을 금방 눈치 챌 것이다. 두 곳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의 의미가 단순한 조경수가 아닌 학문을 의미하는 학자수이기 때문이다.

동양대는 학교 터로서는 최고의 자리를 잡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학교 뒷산을 용(龍)으로 치자면 뒤에서 학교를 감싸듯이 뻗어내린 산줄기는 허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학교가 터를 잡고 있는 곳이 ‘둥두들’이라고 불렸다. 학교 뒷산, 그러니까 용 허리를 감싸고 도는 수로를 따라 흘러온 물이 바로 이 현암정사 밑에 있는 큰 연못에 모두 고인다. 이 ‘둥두들’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용 허리를 따라 흘러온 물 때문에 가문 줄 몰랐다고 한다. 이제 그 물이 큰 소(沼)를 이루어 용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둥두들 곡식 농사보다 더 값어치 있는 사람 농사를 지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현암은 학교를 찾아오는 이들마다 “정말로 학교 터를 좋은 데 잡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인사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터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현암은 1994년 3월 1일 달랑 건물 한 채에 ‘동양공과대학’(현 동양대)으로 개교하기까지 어려웠던 일들을 회상하며 “옳고 좋은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나쁜 생각과 그릇된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런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런 길지(吉地)에 자리를 잡은 덕분일까. 동양대는 2000년, 2001년, 2002년 3년 연속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교육개혁추진 최우수대학’에 선정되기도 했고 지난 1998년 제1회 졸업생부터 2003년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전체 졸업생 가운데 취업률이 85%를 웃도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비록 역사는 짧고 규모는 작아도 유연하면서도 강한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경쟁력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동양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빠르게 변화를 시도해서 성공한 케이스다. 또한 동양대가 공무원 사관학교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도 현암이 시대 흐름을 읽고 교육방향을 설정한 덕분이 아닌가 한다.

▲ 학자수(學者樹)로 둘러싸인 현암정사(玄巖精舍)
동양대는 풍기읍을 젊은이가 넘쳐나는 활기찬 마을로 만들었다. 경제적인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에서 개발한 큼지막한 프로젝트로 지역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실행에 옮기고 있다. 학교 옆 부지 33만578㎡(10만 평)에 경상북도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산업정보단지가 그렇고, 퓨처웍스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문화유산을 상품화해서 학교와 지역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이 실행단계에 들어섰다.

학교와 잇대어 있는 농지와 풍기 시가지를 금계천이 금을 긋기라도 하듯 갈라놓고 있다. 현암은 외국의 역사가 오래된 대학들이 시골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대학과 마을이 하나가 되는 독특한 대학촌을 생각하며 동양대와 영주시 풍기읍도 그런 형태로 진정한 대학촌으로 발전하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그는 영면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점퍼에 운동화 차림으로 학교에 나와 운동장을 돌아보며 풀도 뽑고 만나는 학생들과 교수들과 미래를 논했다. 그는 영면하는 날까지도 학교 관계자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을 계획이었고 그가 남기고 간 한마디는 ‘학교를 잘 챙기라’는 것이었다.

“가장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가장 영리한 것이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새삼 다윈의 말이 현암을 통해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대학이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로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그럴듯한 미명으로 불리는 ‘상아탑’ 속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정리= 한국대학신문 편집국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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