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혜 부산대 선임연구원

*** 한국대학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아 국내 대학 연구자들의 연구환경을 돌아보면서 △우수한 연구 △참신한 연구 △흥미로운 주제를 가진 연구 등을 발굴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지원 성과와 정보를 공유하는 취지에서 연속기획 ‘괴짜과학자들의 위험한 연구’를 마련했다. 자기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에 뛰어든 학자들의 파격적인 상상력을 뒤쫓아 가보자.

 

▲ 박지혜 부산대 선임연구원(사진)은 아동주거학과에서 주거단지계획을 전공했다. 가정관리학과를 다니던 학부시절부터 아파트 거주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30여년을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웃과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유독 아파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대다수 주민들의 심리 기저에 어떤 감정이 작동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 때문에 그는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거리의 인문학자’를 자임한 과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부산대 노인생활환경연구소

차단된 집단거주지 “이웃 분쟁 방치하면 슬럼화” 우려
부산지역 30개 단지·70명 심층 인터뷰 ‘발로 쓰는 논문’ 

[한국대학신문 최성욱 기자] “지금 여기서 뭐하는교! 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아파트 단지에서 목소리 힘깨나 주는 부녀회장이다. 몇 시간째 단지를 배회하던 박지혜 부산대 선임연구원(42세·노인생활환경연구소, 사진)은 화들짝 놀랐지만 그가 부녀회장인 걸 단박에 알아챘다. 부녀회장쯤은 돼야 낯선 사람에게 당당하다. 목소리에 자신감도 실려 있다. “주민들 붙들고 뭐하냐고요!” 수상쩍게 여긴 부녀회장의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갔다.

“제가요…” 박 연구원은 잠시 머뭇하더니 “아는 사람 집에 놀러왔는데예”라고 둘러댔다. 연구하러 왔다고 하면 아파트 평가하러 온 줄 알고 숨어들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인을 경계해요. 불안심리가 강하거든요.”

박 연구원은 아파트 주민 감정·심리전문가다. 아파트 같은 차단된 집단거주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특유의 거주문화를 분석하고 정책을 연구한다.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이웃은 ‘귀찮은 존재’라고 여겨져 왔어요. 강도·절도·성폭행… 귀찮아서 멀리했던 이웃인데 어느 순간 공포의 대상이 된 거죠. 아파트에선 나와 내 가족을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겁나는 거예요. 급기야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통제해야 하고 보안 비용은 늘어만 가죠.”

대규모 축사를 방불케 하는 단절된 공간 ‘아파트’. 이곳에서 이웃은 점점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다. 박 연구원이 아파트 주민의 감정연구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요즘 부모들은 자녀를 길거리에 혼자서 걸어 다니도록 놔두지 않는다. 초중고교생들은 등하굣길에서 학원, 독서실로 이어지는 일상의 동선을 자동차에 실려 다닌다. 눈을 마주치고 공간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이웃은 어느새 나의 안위를 위협할 잠정적 범죄자가 돼버렸다.

아파트 주민들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건 이웃만이 아니다. 집도 방치되고 있다. 박 연구원은 오피스텔형 아파트 입주단지에 들렀다. 새로 지은 집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 집주인은 어차피 세(貰) 줄거니 관심이 없고, 들어와 살 사람도 곧 나갈거란 생각 탓에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은 주인의 것도, 세입자의 것도 아닌 폐가로 스러져간다.

박 연구원은 “소통의 시대에 모든 게 단절된 곳이 아파트”라고 말했다. 모여살기에 위험성도 배가되는 것을 주민들은 체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박 연구원은 ‘평주민’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단지 내 관리·행정에 밝고 이웃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한 부녀회장이나 반장을 만나면 수월했을 텐데. 박 연구원은 기어코 이들을 지나쳐 평주민을 골라 만났다. 이들을 만나려면 단지를 서성이고 멀찌가니 관찰하다가 은근슬쩍 다가가는 수밖에, 딱히 세련된 방법은 없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보통 아파트에서 반상회를 하면 참석율은 20% 미만이에요. 저는 아파트 관리나 시설복구, 각종 단지 내 행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80%의 평주민들 심리가 궁금하거든요. 이들은 행사불참에 벌금을 물리면 그냥 내고 말잖아요. 왜 그럴까요?”

박 연구원은 부산 토박이인데다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에서 30년째 살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속내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수십년째 매달려도 똑부러진 결과가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들어보니 겸손도 무능도 아니다. 주민들의 삶을 더 깊숙한 곳에서 들여다보기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지난 2010년 한국연구재단의 ‘모험연구’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물증(?)을 확보하러 나섰다. 부산 시내 아파트단지 30여 곳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걷고 묻고 또 걸었다. 가족·친구할 것 없이 인맥이 닿는 대로 청탁전화를 돌렸다. 용건은 아파트 주민 좀 만나게 해달라는 것. 길게는 서너 시간씩 인터뷰해 총 70여명을 만났다. 

부녀회나 반상회가 있는 날이면 일부러 지인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저녁에 반상회가 열리면 자연스럽게 한 자리 꿰차고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이나 분양 건처럼 다소 무거운 주제는 주민공청회를 꼭 챙겨가야 한다. 이때 수면 아래 있던 ‘무관심한 주민들’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평소 자기 생각에 감정을 섞어서 토해낸다.

“아니, 얼마 전에 개인택시 하는 분이 이사를 왔던데요. 이 좋은 단지에 개인택시가 어울리기나 합니까. 그것도 다들 보는 데서 택시를 닦던데요. 앞으론 좀 자제해 주세요.”
 
부산의 한 최고급 아파트 반상회 모습이다. 택시기사는 격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박 연구원은 “빈부격차에 따른 계층적 모순이 혼재하는 곳이 아파트”라면서도 “더 우려되는 것은 슬럼화”라고 지적했다.

“오래된 아파트가 노후화 단계에 진입하면 이웃 간 분쟁이 잦아집니다. 윗층에서 아래층으로 물이 새는 일이 많은데 이걸 누가 수리해야 하는지를 놓고 많이들 다투죠. 요즘 사람들은 한두 번 싸우면 아예 이사를 가버립니다. 다음에 오는 세입자는 어차피 자기 집이 아니니까 수리·보수에 무감각하죠.”

이렇게 주인 없이 방치된 아파트는 빠르게 낡아간다. 낡았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잠깐 머물다 갈 세입자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세입자들조차 빠져나가면 아파트는 흉물스런 폐가가 된다. 여기까지다. 시설 노후가 가속화 되면서 분쟁이 늘어나면 사람들이 아파트를 떠난다는 것.

‘논문을 어떻게 쓰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온종일 ‘자료수집’을 하고 연구실로 돌아왔지만 정작 박 연구원의 머릿속은 백지상태이기 일쑤다. 논문을 쓰려면 가설과 학설이 서야 하고 비교실험군도 있어야 하는데 그가 몇날 며칠을 매달린 건 주민들의 목소리가 전부다. 해외의 저명한 학자가 낸 학설을 끌고 들어오려 해도 한국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게 거의 없다.

“논문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어쩔 수 없이 또 새로운 아파트단지를 찾으러 나가요. 논문에 ‘아줌마들이 이렇게 말하던데요’라고 쓸 수 없잖아요.”

그는 멋쩍게 웃었지만 아파트 주민 연구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외 유명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해가며 논문을 쓸 순 있지만, 전혀 다른 문화에서 빚어진 생생한 삶을 직접 보고 들은 이상 논문을 쓰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출 순 없다는 게 그의 학자적 양심이고 고집이다.

결국 논문을 내려놓고 충실한 전달자가 되기로 했다. 연구의 주도권을 주민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목격자, 전달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엄연히 과학자지만 연구의 팔 할이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과학은 논리나 검증을 위한 도구로만 쓰고 ‘거리의 인문학자’가 되길 자처했다.

그렇다고 그가 거리에서 발견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누수·층간소음·실내 흡연 등 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충돌하는 사안들은 공동주택관리 법규를 보다 강화하고 갈등조정기구를 구성해 풀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이웃 간 단절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포는 아직 결론내진 못했다. 그러나 심정적인 확신은 있다.

“이웃을 알고 지내는 건 귀찮은 일로 인식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점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아파트 노후로 인한 안전문제와 불안을 극복하려면 ‘이웃은 남이 아니다’는 인식의 전환 계기를 하루빨리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도 박 연구원은 연구실을 나와 아파트를 걷고 주민에게 묻고 또 걸으면서 논문을 발로(!) 쓰고 있다.

“아지매, 여기 살기 편합니까? 불편한 거 없어예?”

▷연구자: 박지혜 부산대 선임연구원(42세·노인생활환경연구소)
▷주제: 한국주거문화에서 거주자 감정지표 개발에 관한 연구
▷연구기간: 2010년 9월 1일~2013년 8월 31일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