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리 인제대 교수

*** 한국대학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아 국내 대학 연구자들의 연구환경을 돌아보면서 △우수한 연구 △참신한 연구 △흥미로운 주제를 가진 연구 등을 발굴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지원 성과와 정보를 공유하는 취지에서 연속기획 ‘괴짜과학자들의 위험한 연구’를 마련했다. 자기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에 뛰어든 학자들의 파격적인 상상력을 뒤쫓아 가보자. 

 

▲ ‘돌연사’(급성심장사)는 소리 없이 찾아오는 저승사자라는 별명처럼 원인을 알 수 없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자다가 갑자기 심장이 멎어 죽음에 이르는 이 병은 의학계에서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심혈관 전문가 김나리 인제대 교수(사진)는 새벽녘에 가장 많이 분비되는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의심했고, 최근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호르몬 분비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서 예기치 못한 위험에 처하느니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게 더 건강한 삶”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3일 세미나 참석차 방문한 김 교수를 서울 흑석동 중앙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최성욱

새벽녘, 코르티솔 분비 최다 … 돌연사 기전 밝혀 
‘마음의 멍’ 스트레스 관리해야 ‘안 아픈 삶’ 산다  

[한국대학신문 최성욱 기자] 연말 회식자리에서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돌아온 50대 중반의 A씨는 가족들이 깰까 안방문을 슬며시 닫고 잠이 들었다. 그날 아침, 가족들은 A씨를 힘껏 흔들어 깨웠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밤 사이 돌연사(死)한 것이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 잠들다 운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잠들다 죽는 걸 호상(好喪)이라고들 하지만 돌연사는 연령을 가리지 않고 불쑥 찾아오기 때문에 당사자나 유가족 모두에게 황망한 죽음이다. 단서라곤 술·추위·늦은 잠·스트레스가 전부다. 소리 없는 저승사자로 불리는 ‘돌연사’는 의학용어로 ‘급성심장사(死)’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몇 가지 상황증거로 추정할 뿐이다. 오장육부가 평안기에 접어드는 수면 중에 심장은 대체 어떤 이유로 멈춰버리는 걸까.

심장 건강의 핵심은 수축(pumping)이다. 심장이 수축과 이완운동을 반복하면서 혈액을 모았다 짜내면 혈관을 타고 흐르는데 급성심장사는 이 기능이 일순간 멎어버리는 것이다. 학계는 ‘심장비대증’에 집중했다. 카테콜라민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 탓에 심장벽이 점점 두꺼워져 수축기능을 떨어뜨리는 증상이다. 심장비대증은 가벼운 운동에도 숨이 차는 호흡곤란이나 흉통과 같은 전조(前兆)가 있다. 그런데 급성심장사는 전조가 전혀 없었던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카테콜라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심장비대증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나리 인제대 교수(43·생리학교실, 사진)는 이 지점을 주목했다.

‘그래, 코르티솔일 거야!’

코르티솔(cortisol)은 콩팥의 부신 피질에서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스트레스 등 외부의 자극에 맞서 최대의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게 혈압과 포도당 수치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사람이 갑자기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데 이때 코르티솔이 장기(臟器)와 근육의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맥박과 호흡을 빠르게 해서 최대한 많은 양의 혈액을 온몸으로 돌게 하지만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면 고혈압을 일으키거나 근육을 손상시킨다. 세포기능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가 오히려 세포를 죽인다. 약이 독이 되는 것이다. 선행연구는 딱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심장은 왜 갑자기 멎는 거지?’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불현듯 김 교수의 뇌리를 스쳐간 연구결과가 하나 있었다. 원인을 알 순 없지만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코르티솔의 혈중 농도가 가장 짙다는 것이다. 코르티솔이 한꺼번에 많은 양이 분비되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될까. 김 교수는 곧바로 실험에 착수했다.

“심장은 온몸에 흐르는 전기자극으로 1분에 70여 번 뛰어요. 전기신호를 조절하는 건 신경인데 과다분비된 코르티솔은 전기신호를 망가뜨리고 세포도 죽이죠. 일정한 리듬으로 뛰어야할 심장박동에 계속 엇박자가 나면 어느 순간 심장이 멈추지 않을까요?”

실험은 세 가지 방법을 썼다. 우선 실험용 쥐에 코르티솔을 주사한 후 혈압을 측정하고 초음파를 관찰했다. 한쪽에선 랑겐도르프시스템(심장만 떼어내고 생리식염수에 담가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시키는 실험장치)을 이용해서 쥐의 심장을 꺼내 코르티솔을 투여했다. 또 다른 곳에선 심장세포를 떼다가 전기신호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활성 정도를 분석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세 가지 실험 모두 심장기능이 일시에 떨어졌고 얼마못가 멈췄다. 코르티솔이 급성심장사를 일으킨다는 기전을 규명한 것이다.

“이제 코르티솔 분비량을 조절하면 급성심장사를 예방할 수 있겠네요?”

기자의 우문(愚問)에 김 교수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에요. 새벽에 코르티솔이 최대로 분비되는 데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거든요. 호르몬 분비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해버리면 우리가 모르는 몸의 어느 곳에서 끔찍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일단 코르티솔이 심장부정맥(수축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기전을 밝혀냈을 뿐 후속연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단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은 의학적으로 밝혀진 게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운동이 대표적이죠. 운동을 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몸도 건강해진다는 걸 알지만 의학적으론 왜 그런지 아직 몰라요. 스트레스도 마찬가집니다. 스트레스가 신체에 어떤 기전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죠.”

 

▲ ⓒ최성욱

‘현대인의 불치병’ 스트레스는 실은 마음이 멍든 것이다. 심혈관생리학을 전공한 김 교수가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으로 일부의 기전을 밝혀내긴 했지만 스트레스를 정복하진 못하는 이유다. 스트레스를 연구하는데 되려 연구자가 스트레스를 받는 지독한 딜레마를 김 교수는 의학적으로 풀어냈다.

“스트레스 호르몬을 조절해서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바에야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 더 훌륭한 연구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부작용은 없잖아요.”  

김 교수는 실험 전에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관련 논문을 닥치는 대로 찾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연구결과들을 통합적으로 분석한다. 자신의 ‘촉’이 맞아떨어질지 예측하는 작업이다. 연구과정에서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냐는 질문에 그는 단박에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실험에 임해요. 시나리오를 하나씩 해보는 게 실패는 아니잖아요. 이것 해보고 안 되면 다음 것 해보면 되니까 시행착오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지루한 실험이 그에겐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생명연장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바람도 조금 떨어져서 생각해 보잔다.

“행복한 삶은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안 아픈 삶 아닌가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살아야 삶의 질도 높아지는 거고요. 의학은 병을 치료할 뿐이지 삶까지 디자인 해주지 않습니다.”

김 교수는 이처럼 조금씩 비틀어보고 때론 반대로 행동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연구실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자료를 찾는 일이 많으니, 쉴 땐 사우나에 가서 수다를 떨거나 여행을 떠나고 골프를 친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을 경우엔 자버린다.

“심장이든 뇌든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쉬는 것도 지나치면 스트레스예요. 코르티솔처럼요.”

삶을 거대한 스트레스의 나날이라고 가정하면, 의과대학 졸업 후 임상의 대신 기초의학 연구자의 길을 택한 것도 그만의 스트레스 조절에 따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기초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호기심과 연구 열정이 스트레스를 밀어낼 것이라는 확신이다. 취조(!)에 가까운 인터뷰의 스트레스를 집어삼키듯 김 교수는 내내 활짝 웃고 있었다.

▷연구자: 김나리 인제대 교수(43세·의과대학 생리학교실 심혈관대사질환센터)
▷주제: 스트레스 호르몬과 심장부정맥의 관련성 연구
▷연구기간: 2010년 9월 1일~2013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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