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쁜 세상살이로 그간 잊고 있던, 묻고 있던 생각과 말들을 끄집어내 새롭게 재해석해줄 <강위석의 ‘생각을 따라 말을 따라’>를 연재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좇아가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건 어떨까.

칼 마르크스는 1871년의 파리콤뮨이 3일천하로 좌초한 다음 극단주의와 교조(敎條)화로 치닫던 사회주의 운동에 염증을 느껴 이제부터 자기는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라고 자신의 둘째 사위에게 쓴 편지에 단언하였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었을 때 이미 사회주의는 그가 생각했던 사회주의로부터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공자의 제자인 염구(冉求)는 탁월한 행정가요 용맹스러운 장군이었다. 노나라 권력자인 계씨(季氏)는 염구의 이런 능력을 높이 사서 신하로 중용하였다. 염구는 스승인 공자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씨 정권을 위하여 백성에게 부과하는 조세를 대폭 올렸다.

이에 공자는 진노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염구는 더 이상 우리 무리가 아니다. 너희들은 깃발을 올리고 북을 쳐서 염구를 탄핵하라.”공자는 마르크스와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자신이 탈퇴하는 대신 염구를 파문(破門)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유교는 염구를 복귀 시켰다. 그는 공자의 십대제자, 즉 십철(十哲) 가운데 하나로 추앙되고 있다. 공자도 염구의 출중한 행정 능력을 사람들에게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문한 것은 공자가 보기에 염구는 유교와 적대되는 노선을 따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들어갔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정치적 이상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유교를 어떤 것이라고 보았을까. 왜 염구가 주례(周禮)에 정한 것보다 과도한 세금을 백성에게 지운 것을 그다지도 심각하게 여겼을까.

다음 일화는 다시 염구와 관련된다. 공자는 염구 축출 사건 훨씬 전인 쉰다섯 나던 해 몇 제자를 데리고 14년에 걸친 이 나라 저 나라 방랑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간 곳이 위(衛)나라였다. 염구가 수레를 맡아 몰고 있었다. 염구가 공자에게 정치의 목적을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는 것이다.” 염구가 또 물었다. “백성이 잘 살게 된 다음에는 무얼 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공자는 인민의 경제가 부유해지고 인민에게 문화가 널리 보급되는 것에 정치의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민본주의(民本主義), 나아가서 가족주의의 사람이었다. 민(民)은 관(官)에 대치하는 말이다. 그는 관의 윤리인 군신(君臣)간의 충(忠)보다 민(民), 아니 가족의 윤리인 자효(慈孝)를 우선하였다.

이 점은 초(楚)나라 세력가인 섭공(葉公)과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섭공이 말했다. “우리 동네에 정직한 자가 있어 그 아비가 남의 양을 훔치자 그것을 관에 고발했소.”공자가 말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비는 자식의 잘못을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의 잘못을 숨겨주는 것을 정직이라 말하오.”

중국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과 문무주공(文武周公)을 거쳐 공자에 이르기까지 유교는 오교(五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가르치는 바가 다섯 가지라는 뜻이다. 즉 아비는 의롭고(부의;父義) 어미는 자애롭고(모자;母慈) 형은 우애롭고(형우;兄友) 아우는 공경하고(제공;弟恭),아들은 효도하는 것(자효;子孝)이 그것이다.

공자의 정치학은 가족 안에서 닦아지는 이 다섯 가지 품성에서 뛰어난 인격자가 정치를 맡아야 한다는 정치가 자질론이다. 이 다섯 가지 품성을 하나로 요약한 단어가 인(仁)이다. 인은 권력을 위한 정치학이 아니라 반(反)권력의 정치학이다.

한무제 때부터 유교는 중국의 국교로 채택되어 전제주의 집단주의 국가권력을 위한 이론으로 모셔지게 된다. 공자는 이런 유교의 시조(始祖)로 보쌈 당해 가서 청말(淸末)까지 2천년 넘게 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유교는 공자의 유교가 아니라 ‘염구(冉求)들’의 유교였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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