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을보라③]세상을 밝히는 건강한 눈으로 미래 주역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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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의사 명곡 김희수의 삶과 육영사업<1> 병원에 경영을 도입하다

*** 국내 안과전문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김안과’의 설립자 명곡(明谷) 김희수 박사(85세). 폐교 위기에 놓인 한 중학교를 인수하면서 건양대를 설립하기까지 그의 삶은 세상과의 소통과 함께해왔다. 건양대 총장을 지내고 있는 요즘 그는 새벽부터 대학병원과 캠퍼스를 돌며 환자와 학생, 시설을 점검한다. 길가에 떨어진 담배 꽁초 하나도 손수 줍는 그는 안팎에서 ‘소통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의사 출신으로 육영사업에 뛰어든 그의 삶을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좌>대전보건소장 시절 동료들과 함께. <우>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에는 '치료 이상'의 산뢰를 주고자 했다.

전쟁통에 구호병원 전전하며 환자진료
3명에서 300명 대식구 꾸린 '김안과'
과거 · 현재 · 미래도 봉사는 계속돼야

1962년 겨울, 서울 영등포로터리의 작은 안과병원. 이 병원은 꼭 ‘만남의 광장’ 같았다. 환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 수다 한판이 벌어지곤 했다. 이 병원의 원장 명곡 김희수 박사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실명의 위기에 놓인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췄다. 환자들에게 나을 수 있다는 믿음부터 줬다. 앞 못보는 환자들은 곧 안정을 찾아갔다. 진료가 늘수록 환자도 늘었다.

김 박사에게 눈병은 마음의 병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의료봉사를 자처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 지역의 한 중학교를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육영사업은 그에게 ‘사회의 병’을 치료해 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건강한 삶을 바라보는 특유의 섬세한 시선은 폐교 위기에 놓인 중학교를 살려내는 데로 옮겨갔다. 이후 고등학교와 4년제 종합대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했건만. ‘바른 인성’과 ‘소통’을 최우선에 둔 그만의 교육철학은 수년만에 학교와 학생들을 반석(盤石) 위에 올려놨다.

그가 말하는 소통은 타인을 진실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이고, ‘이해’는 바른 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부터 몸소 실천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마주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소통’으로 결실을 맺었다. 병원은 환자를 위한 곳으로, 학교는 학생을 위한 곳으로 무럭무럭 커나갔다.  명곡선생으로부터 왜 , 어떻게 육영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직접 들어보자.  

한국전쟁 발발…전화(戰禍) 속에 핀 의사의 꿈
  
일제의 무단 통치가 한창이던 1928년 7월 9일, 잿빛 하늘 아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다. 이날 나는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모두가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각박하고 어려웠지만  부모님은 내가 의사로 커주길 원했다.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는 숭고한 직업이고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먼저 형이 의사가 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의사의 꿈을 키워갔다. 

의사가 되려면 의과대학에 진학해야했다. 예나 지금이나 의대는 높은 학업성적이 필요했다.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길 바라면서도 공부에 대한 부담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공부는 스스로 찾아서 해야했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깜깜한 저녁에는 가족들의 잠을 방해할까 이불 뒤집어쓰고 손전등으로 책을 비춰가면서 공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20대 청년이 됐다. 현재 연세대의 모체인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의학공부에 매진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전쟁(1950년)이 발발했다.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할 겨를도 없이 전국 각지의 구호병원을 다니며 전화(戰禍)에 휩쓸린 환자를 치료했다. 전쟁이 끝나고부터는 꾸준히 돈을 모았다. 유학가서 공부를 더하기 위해 미국가는 승선 티켓을 구했다. 그리고 15일 동안 배로 태평양을 건넜다. 어렵게 온 유학인 만큼 더 많이 배워야했다. 뉴욕 프란시스병원에서 인턴을 수료하고 일리노이주립대 안과대학원에서 의학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공부할 때 안과대학원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안과는 의사의 아주 미세한 솜씨(?)로 수술의 성패가 좌우되는 ‘Micro Surgery’였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내 섬세한 성격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미국에 공부를 마친 후  귀국하자마자 인천 기독병원, 부산 제3육군 병원 안과과장 등을 맡으며 병원 개원을 준비했다. 어떤 병원을 세울까, 운영은 어떻게 할까 등 고민꺼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962년 광복절, 잊을 수 없는 개원

수년간 ‘월급의사’를 거친 후 안과를 개원하기로 결심했다. 서울 영등포로터리에 있는 신축 건물의 2층 사무실이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날이 1962년 광복절이다. 나를 포함해 의사 세 명이 ‘김안과’를 열고 첫 진료를 시작했다. 진료가 끝나면 동네 구석구석을 돌면서 병원 홍보전단지를 붙였다. 동네 사람들을 가가호호 방문해 눈이 아프면 우리 병원을 꼭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가깝게는 안양, 멀게는 수원까지 가서 전단지를 뿌렸다. ‘김안과’라는 다소 평범한 이름이었지만 환자들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우리 병원이 있던 영등포 일대는 서울에서도 꽤 복잡한 곳이었다. 1964년에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대규모 공장지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 공장직원이 참 많았다. 쇠를 깎는 일을 하던 직원은 쇠의 파편에 망막이 손상됐고, 오랜 시간 재봉틀 기계를 들여다보던 섬유공장 직원은 사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병을 감추려고 앞머리를 길게 길러 눈을 가리고 다니곤 했다. 병을 고친 일부 공장직원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까지 모셔와서는 치료해 달라고도 했다.

병원이 많지 않던 시절 의사들은 환자가 주인이라는 의식이 부족했다. 병원을 찾아온 많은 환자들이 돈은 돈대로 쓰면서 자존심에 생채기를 안고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병원이 하나 둘씩 생기면서 환자가 병원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대형병원은 환자 유치를 위해 의료광고를 내걸기도 했고, 환자가 찾지 않는 병원은 문을 닫았다.

몸집을 불려가던 병원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그만 동네 병원을 운영하던 나도 나름의 운영 방침을 세워야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나름대로 치료해왔지만 그간 안과 분야의 좁은 틀 안에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환자가 늘고 의사와 직원이 많아지면서 ‘경영’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병원에 가져와야 했다. 요즘 말로 ‘융합’이다.

‘병원경영’의 목표는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었다. ‘치료 이상의 만족’.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환자에게 존중과 신뢰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 내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직원들의 인성을 교육했다. 당시엔 낯설었던 ‘서비스 정신’을 병원직원들에게 강조했다. 

서비스 정신이란 실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환자가 진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예의와 존중을 받는 것, 환자가 진찰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병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 자세히 알려주는 것,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 신뢰와 긍정적인 기운이 움텄고 질병 치료에 큰 힘을 발휘했다.

진료비 부담 덜고 ‘전문치료’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생활보호대상자에 한해 전국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됐다. 이 때만해도 의료보험제도 초기라 희망하는 병원에 한해 개별계약제로 이뤄졌다. 대다수 병원이 이 제도에 반대했지만 나는 미국에서 의료보험제도의 장점을 경험했기에 찬성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민이 많은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해 진료비도 싸게 받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늘면서 의료진도 꾸준히 충원했다.

병원 규모가 커지자 1979년에는 영등포 청과물시장 입구에 1300평 규모의 부지를 샀다. 이곳에 병원을 새롭게 지었지만 더 큰 병원이 필요했다. 1986년 7월, 연면적 3000평 규모의 병원을 짓고 이전했다. 병원 이전 후엔 국내 최초로 세부 전문 분야를 구분해 진료했다. 담당 의사는 자신의 전공분야를 최대한 살릴 수 있어서 좋고, 환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25평 사무실에서 의사 3명으로 개원한 김안과가 50여년이 흐른 지금은 300여명의 대식구와 함께하고 있다. 병원이 환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의사의 기본 덕목인 봉사를 실천하고 싶었다. 1998년부터 매년 ‘세계 눈의 날’을 기념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무료 안(眼)검진을 시작했다. 급한 치료가 필요하거나 바쁜 일정으로 병원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환자들을 고려해 1년 365일, 주말에도 빠짐없이 병원 문을 열었다. 의학연구를 멈추지 않으려고 연구소도 설립했다.

김안과의 성장이 현재 국내 안과의 수준을 높이는 데 미력하게나마 기여하지 않았을까 자평해본다. 특히 미세수술 수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명성을 얻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언제나 내겐 의학지식이나 의료기술보다 중요한 게 있다. 과거에도 현재도 또 앞으로도 사회에 봉사하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 명곡 김희수(明谷 金熺洙) 연보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출생(1928.7.9), 세브란스 의과대학(현 연세대) 입학(1946.9), 용산철도병원 인턴 발령(1950.7), 한국전쟁 중 전주구호병원 근무(1950.10~1951.9), 대전구호병원 및 대전보건소 초대 소장(1951.10~1956.6), 미국 뉴욕 프란시스병원 인턴 수료(1956.7~1957.6),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안과대학원 졸업(1958.12), 시카고 안과병원 수학 후 귀국(1959.9), 인천 기독병원 안과과장 부임(1959.11), 부산 제3육군 병원 안과과장 역임(1961.7), 김안과의원 개원(1962.8),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의과대학 안과 외래교수 역임(1963.2), 연세대 의학박사 학위 취득(1966.2), 학교법인 건양학원 이사장 취임(1979.8), 양촌중학교 설립(1980.9.1), 대한안과학회 제 24대 회장 취임(1981.10), 대통령 표창(1982.3), 양촌고등학교 설립(1983.3),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설립(1984.12),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김안과병원 신축이전 개원(1986.8), 건양대 설립(1991.3), 충남 개도 백주년 기념 ‘충남을 빛낸 100인’으로 선정(1996.10), 건양대병원 개원(2000.2), 연세대 의대 총동문회 ‘올해의 동문상’ 수상(2001), 건양대 총장 취임(2001~현재)

<정리=이은진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 이 시리즈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고자 8부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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