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의사 명곡 김희수의 삶과 육영사업<2>1980년 봄 양촌중 개교 ‘잊을 수 없는 순간’

*** 국내 안과전문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김안과’의 설립자 명곡(明谷) 김희수 박사(85세). 폐교 위기에 놓인 한 중학교를 인수하면서 건양대를 설립하기까지 그의 삶은 세상과의 소통과 함께해왔다. 건양대 총장을 지내고 있는 요즘 그는 새벽부터 대학병원과 캠퍼스를 돌며 환자와 학생, 시설을 점검한다. 길가에 떨어진 담배 꽁초 하나도 손수 줍는 그는 안팎에서 ‘소통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의사 출신으로 육영사업에 뛰어든 그의 삶을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 고향 양촌면의 하나뿐인 중학교가 빚더미에 앉아 사라질 위기에 몰리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수했지만 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학교의 주인인 아이들이 공부하기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인근 부지 1만 3000평을 구입해 새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양촌중학교 신축현장을 찾은 지인들과 함께한 기념사진(왼쪽에서 다섯 번째).
1978년 고향에서 걸려온 전화 “중학교 인수해 달라”
전문지식보다 중요한 교육가치 ‘첫째도 둘째도 인성’

1978년 어느 날, 서울 영등포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고향 충남 논산의 한 유지 분의 목소리였다. 반가움의 안부도 잠시, 그분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화제를 꺼냈다. 고향의 한 중학교를 인수할 의향이 없냐는 부탁이었다. 그 학교는 양촌면에 위치한 ‘인수학원’이었는데, 1970년부터 학교법인으로 허가를 받고, 양촌 지역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학교가 진 부채가 점점 늘면서, 누군가가 학교를 인수하지 않으면 조만간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목소리는 다급했다.

나는 선뜻 부탁에 응하지 못하고 거절했다. 평소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육영사업에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두려움이 앞섰다. 더군다나 그땐 김안과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육영사업은 그저 막연한 동경일 뿐이었다.

그런데 수화기를 내려놓고부터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안과 진료 후에도 틈만 나면 인수중학교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인수학원이 있던 양촌면에는 다른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인수학원이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중학교였는데 재정난으로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눈에 밟혔던 것이다.

학교가 빚을 갚지 못하고 문을 닫으면 양촌면 아이들은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가야했다. 덩달아 차비와 시간낭비도 커질 게 뻔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양촌면 학생들이 중학교를 떠나는 날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결국 미뤄뒀던 육영사업에 대한 오랜 숙원을 그 참에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후 고향 유지 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한 번 더 같은 부탁을 받았다. 나는 그 부탁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반갑기까지 했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네, 제가 인수하죠.”

나는 학교가 안고 있던 빚 1억5000만원을 대신 갚고, 추가로 1억2000만원을 출연해 학교를 인수했다.

■‘학생을 위한 학교’로 “모두 바꿔”= 모든 계약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인수학원의 운영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리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양촌면을 찾았다. 인근지역이 온통 내가 어릴 적에 뛰놀던 곳이라 그런지 익숙했지만 현대식으로 바뀐 건물도 꽤 많이 보였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도착해선 조금 당황했다. 예상은 했지만, 학교는 더 열악했다. 아이들이 공부하기엔 너무나 비좁은 교실, 나무판자가 다 갈라진 책상, 한여름에도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돗가, 텅 빈 교구함, 작동하지 않는 냉난방시설 등 보수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보수를 하느니 새롭게 학교를 짓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김안과를 운영하면서도 고객을 위하는 것이 병원을 위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경영철학이 있었다. 병원의 고객인 환자가 진료 받기 편안한 환경, 학교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인수학원의 고객이고 주인인 아이들이 공부하기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

학교를 옮기기로 했다. 일단 1만3000여 평의 양촌면 인근 부지를 샀다. 새 건물을 올렸다. 하루가 다르게 한 층 한 층 튼튼하게 세워지는 학교 건물을 보면서 튼튼한 교육과 튼튼한 아이들을 만날 기대에 잠을 못 이루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해도 흔치 않았던 컬러TV를 교실에 놓는가하면 운동장 한쪽에는 테니스장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신나게 뛰어놀 공간을 만들었다.

교정을 꾸미는 일은 아내 몫이었다. 내가 하는 추진하던 일들에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였던 아내는 전국을 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교정이 예쁘다는 학교를 탐방하면서 직접 자료를 모았다. 아내 특유의 미적 감각을 한껏 살려 화사한 교정을 꾸며줬다. 덕분에 1980년 봄, 학교 신축공사를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 완공했다.

사실 내가 병원을 세우고 운영은 하고는 있었지만, 육영사업은 처음인 탓에 신중하게 결정해야할 일이 참 많았다. 학교 운영의 조언도 들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은사님께서는 유교와 동양철학, 한학에 관해 말씀하시며 ‘건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건양(建陽)은 ‘볕을 밝힌다’는 뜻으로, 예부터 여러 의미로 쓰였다고 했다.

봄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되면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는 뜻의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에 건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1896년 고종이 제정한 조선의 연호이기도 했다. 그 의미가 왠지 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더군다나 학교 문을 새롭게 여는 시기가 봄이라서 그 산뜻한 시작의 이미지가 참 좋았다. 건양학원으로 학교 이름을 정했다. 이름이 가진 밝은 기운처럼 학생들이 올바르고 밝은 인재로 성장하기를 소망했다.

■인성 도외시 하는 암담한 현실 “인성부터 가르치자”= 처음에 내가 인수학원를 인수한 건 폐교 위기에서 학교를 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고향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스무 살에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하면서는 오랫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줄 몰랐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 짙었다. 김안과를 개원하고는 벌어들인 돈을 쓸 틈도 없이 지냈는데 이제는 고향을 위하면서 뜻 깊은 일에 쓰고 싶었다. 고향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는지 의료봉사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러던 중 고향을 위하고 또 장기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은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넓게는 사회 환원의 큰 실천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육영사업에 뛰어든 것 같다.

‘육영사업’

말 그대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인재 양성의 첫 단추는 ‘진정한 인재란 누구인가’에 대한 교육자의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교육기관의 향방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때, 내가 생각한 인재는 뛰어난 전문지식보다 인성을 먼저 갖춘 사람이었다. 

지금도 변치 않는 교육관이 있다. 우리 사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각자의 이기심을 내세운 채 소통하지 않는다면 갈등과 시기, 질투로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다.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조화로운 관계로 지내기 위해선 ‘원활한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소통은 좋은 사람됨이 갖추어질 때 진정으로 우러나온다.

인성은 다른 게 아니다. ‘사람됨’이다. 됨됨이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 교육지표가 돼야한다. 우리사회는 인성교육을 강조하긴커녕 물질만능주의와 인명경시풍조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회가 인성과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걱정이 커져갔다. 인성교육, 이대로는 암담했다.

매사에 인성을 강조했다. 가정에서도 병원에서도 그리고 학교교육에서는 특히 그랬다.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교육과 훈련으로 다듬어진다. 건양학원 교육과정에 인성교육을 우선적으로 편성했다. 교사를 채용하고, 교사가 수업 외에 학생을 대할 때에도 좋은 사람됨을 기본으로 삼도록 방침을 내놓았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 존중하는 방법, 스스로 반성하는 방법 등을 교육하며 이성적 인성관을 세워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학생들을 육성하고, 학교의 재정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져갔다. ‘양촌중학교’로 교명 허가를 신청했다. 건양이라는 이름을 참 좋아했지만 그때까지도 양촌면에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지역을 대표하는 교명을 사용했다. 1994년에 건양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지금도 건양중학교를 지나갈 때면 열악했던 환경부터 새롭게 단장하던 설렘의 순간과 꺄르르 웃으며 운동장을 뛰놀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내가 운영을 맡고나서 처음으로 맞았던 졸업식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그 학생들이 어느덧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인재로 활동하고 있다니. 참 뭉클하다. 건양중학교는 바른 인성교육과, 시대를 앞서가는 교육환경으로서 학생들의 성장을 돕고 있다고 자부한다. 훌륭한 인재들이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며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 지금도 내 마음엔 기쁨이 가득하다.

■ 명곡 김희수(明谷 金熺洙) 연보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출생(1928.7.9), 세브란스 의과대학(현 연세대) 입학(1946.9), 용산철도병원 인턴 발령(1950.7), 한국전쟁 중 전주구호병원 근무(1950.10~1951.9), 대전구호병원 및 대전보건소 초대 소장(1951.10~1956.6), 미국 뉴욕 프란시스병원 인턴 수료(1956.7~1957.6),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안과대학원 졸업(1958.12), 시카고 안과병원 수학 후 귀국(1959.9), 인천 기독병원 안과과장 부임(1959.11), 부산 제3육군 병원 안과과장 역임(1961.7), 김안과의원 개원(1962.8),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의과대학 안과 외래교수 역임(1963.2), 연세대 의학박사 학위 취득(1966.2), 학교법인 건양학원 이사장 취임(1979.8), 양촌중학교 설립(1980.9.1), 대한안과학회 제 24대 회장 취임(1981.10), 대통령 표창(1982.3), 양촌고등학교 설립(1983.3),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설립(1984.12), 의료법인 건양의료재단 김안과병원 신축이전 개원(1986.8), 건양대 설립(1991.3), 충남 개도 백주년 기념 ‘충남을 빛낸 100인’으로 선정(1996.10), 건양대병원 개원(2000.2), 연세대 의대 총동문회 ‘올해의 동문상’ 수상(2001), 건양대 총장 취임(2001~현재)

<정리=이은진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 이 시리즈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고자 8부작으로 기획됐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