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을보라③]“실무에 능통한 인재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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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의사 명곡 김희수의 삶과 육영사업<3> 1991년 고향 땅에 심은 미래의 씨앗 ‘건양대’

*** 국내 안과전문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김안과’의 설립자 명곡(明谷) 김희수 박사(85세). 폐교 위기에 놓인 한 중학교를 인수하면서 건양대를 설립하기까지 그의 삶은 세상과의 소통과 함께해왔다. 건양대 총장을 지내고 있는 요즘 그는 새벽부터 대학병원과 캠퍼스를 돌며 환자와 학생, 시설을 점검한다. 길가에 떨어진 담배 꽁초 하나도 손수 줍는 그는 안팎에서 ‘소통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의사 출신으로 육영사업에 뛰어든 그의 삶을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실무 중심 교육 집중…취업률 75.8% 경이적인 기록
1991년 신입생 400명…20년 후 전교생 8000명 성장

▲ 건양중고교 체육대회
주말도 없었다. 나는 토요일에는 김안과(서울 영등포)에서 진료를 하고, 일요일이면 충남 논산의 건양 중고등학교로 달려갔다. 의료사업과 육영사업을 동시에 맡는다는 건 생각보다 버거웠다. 몸이 하나라는 게 야속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다행히 해를 거듭할수록 김안과도, 건양 중·고등학교도 안정을 찾아갔다. 기반이 잡혀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열정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1986년 어느 날,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었던 신극범 박사와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대뜸 내게 고향에 전문대학을 하나 세워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정부 일을 하고 있던 신 박사는 대전대와 한국교원대 총장을 지냈고, 순천향대 석좌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육영사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그가 내게 더 큰 짐(?)을 넘긴 건 그만큼 나를 믿었기 때문이었지 싶다. 

신 박사가 툭하고 던진 제안은 내 열정에 불씨로 옮겨 붙었다. 그러나 중고교로 겨우 교육의 텃밭을 일구고 있던 내겐 대학은 쉽게 넘기는 힘든 산이었다.

‘그래, 대학을 세워보자!’

다시, 교육 전문가들을 수소문했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대학 설립을 만류하던 사람들은 당시 내 나이 60대에 이미 병원과 중고교를 운영하는 것도 바쁘지 않느냐며 걱정했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엔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대학가에 확산되면서 학생들이 한창 예민할 때 아니었던가. 정상적으로 수업을 이어가기도 힘들었던 시기다. 전문가들은 대학을 설립한다고 해도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가 처음 육영사업을 시작할 때 마음에 뒀던 목표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이야말로 초심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매일 밤 반대 의견을 적어놓곤 곰곰이 따져봤다. 건양 중고교를 운영하면서 쌓아온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 몸과 마음에 피가 되고 살이 돼 있을 거야.’

▲ 건양대 논산 창의융합캠퍼스 명곡정보관

■‘대학교육 무용론’ 정면 돌파 시도= 일단 기존의 대학과 비슷한 건 싫었다. 기존 대학들의 교육목표가 진리 탐구였다면 나는 국가적 목표와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 머릿 속의 대학교육의 현실은 이랬다. 대다수 교수들은 현장 경험이 부족한 채로 전통적 이론을 강의하는 데 머물러 있고, 현실과 유리된 교육이 많았다는 것. 실제로 어떤 기업체 대표들은 공공연히 ‘대학교육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생산하는 연구논문의 대부분이 현실에서 활용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기업과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랐다. 대학교육과 실무형 인재양성의 연관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 ‘실무 중심 교육’의 해법을 풀어야 했다. 고민은 더 깊이 파고들었고 복잡해졌다.

건양 중고교처럼 대학도 고향인 논산에서 세우기로 했다. 육영사업의 결실이 고향과 지역사회에 든든한 힘으로 퍼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부지를 물색했다. 김안과가 있는 영등포에서 논산까지 당일치기 여정(旅程)이 이어졌다. 기차와 버스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갈아탔는지 모른다.

논산 시가지 외곽에 있던 담양 전씨 문중의 소유지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노고(勞苦)는 이때부터였다. 몇몇 집주인이 땅 팔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교문 옆의 부지 수백 평은 시가의 40배 이상을 쳐줬으니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정부에선 신도시 개발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있던 터라 건축자재가 동이 났다. 고맙게도 홍재식 전 산업은행 부총재께서 시멘트 공급 활로를 뚫어줬고,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은 철근을 지원해줬다.

가까스로 1989년, 대학 설립 공사의 첫삽을 떴다. 착공 1년 만에 △인문학관 △경상학관 △이공학관 △기숙사가 완공됐다. 이듬해 11월에는 10개 학과(모집정원 400명)로 교육부 설립인가를 받았다. 교명은 ‘건양대’. 웅켜 쥔 두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학교는 세웠지만 학생이 채워지리란 보장은 없었다. 김안과 설립 때 서울과 안양, 수원을 오가며 전단지를 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논산과 가까운 대전과 충남 일대의 고교를 찾아다니며 학교를 홍보했다. 김안과 고객들에게도, 서울 서남부와 경인지역까지 발품을 팔았다. 실용적인 학풍과 양심적인 대학 운영을 홍보하고 약속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건양대 첫 해 모집 경쟁률 ‘7.5대 1’.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일면식도 없는 나를 믿어줬다는 데 감개무량했다. 1991년 3월 2일, 신입생 400명, 교수 25명, 직원 10명으로 첫 번째 입학식을 열었다.

■인성·외국어 등 ‘H4C교육’ 실험= 1990년대 우리사회를 삽시간에 휩쓸었던 정보화 패러다임은 이젠 대학도 실무교육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교육과정의 혁신은 젊고 실력 있는 교수를 임용해 ‘현실 감각’을 동력으로 맞춤식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실무교육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모든 학생에게 ‘H4C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H4C란 인성·외국어·IT·자격증·창의력 등을 중심에 둔 교육으로 질 높은 취업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때만 해도 실험적 시도였다. 이 때문일까. 교육부로부터 ‘특성화 우수대학’에 선정돼 재정지원을 받았다.
 
실무와 취업역량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는 한층 더 속도를 냈다. 국내 최초로 대학기관 안에 취업전문상담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전교생이 신입생 때부터 진로 상담을 받게 했다. 학생 한명 한명에게 적성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상담하고 자질과 학력수준을 분석해 자료를 축적했다. 1~4학년 동안 학생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전략만으로 성과를 내긴 어려웠다. 동기부여가 중요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특강을 열었고 기업체 인턴십 정보를 공지해 학생들이 실무경험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10여년이 지나고 건양대는 취업률 75.8%(2012년)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실무를 중시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추구한다고 해서 짜맞추듯 획일적인 교육을 했다면 취업률 75.8%는 요원했을 것이다. 개성을 빨리 발견하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교육이야말로 건양대 교육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건양대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요즘엔 건양대가 ‘취업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설립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식과 같은 학생들을 졸업 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설립 초기에 내 나이는 이미 칠순을 넘긴 할아버지였지만, 전국 방방곡곡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알아봤다.

이렇게 해서 학생 한 명을 취직 시켰는데 그때를 잊을 수 없다. 중소기업체 대표를 만나 우리 학생들의 바른 품성과 실무능력을 강조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그리고 한 업체로부터 채용전화를 받았다. ‘진심은 통하는구나.’ 그 후로 나는 더 많은 기업체를 찾아다니면서 취업을 부탁했다. 취업청탁이 대학총장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싫은 소리도 들었지만 단지 취업률 올리려고 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당당했다. 아니, 절박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내 마음을 잘 헤아려준 덕분이었을까. 취업률 전국 2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수험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신생 건양대’에 지원자가 줄을 섰다. 10개 학과, 학생 수 400명의 소규모 대학은 어느새 2개 캠퍼스에, 전교생 8000명에 달하는 중규모 대학으로 성장했다.

기업체에선 졸업생들은 물론이고, 건양대에서 개발한 기술까지도 기꺼이 상품화해줬다. 믿고 맡기는 거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건양대가 취업만을 강조한 대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단순히 직업을 갖는 것 이상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질을 갖추는 실무를 얻어가길 바랐다. ‘최고 실용교육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는 건양대는 지금 충남권의 지식산업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건양이 낳은 인재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주역(主役)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건양대에 살아 숨쉬는 미래이고 비전이다.

<정리=이은진 객원기자>

*** 이 시리즈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고자 8부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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