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의사 명곡 김희수의 삶과 육영사업<5> ‘지방대 위기’ 소방수 자처하다

*** 국내 안과전문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김안과’의 설립자 명곡(明谷) 김희수 박사(85세). 폐교 위기에 놓인 한 중학교를 인수하면서 건양대를 설립하기까지 그의 삶은 세상과의 소통과 함께해왔다. 건양대 총장을 지내고 있는 요즘 그는 새벽부터 대학병원과 캠퍼스를 돌며 환자와 학생, 시설을 점검한다. 길가에 떨어진 담배 꽁초 하나도 손수 줍는 그는 안팎에서 ‘소통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의사 출신으로 육영사업에 뛰어든 그의 삶을 총 8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외환위기 결자해지 마음으로 총장으로 나서
학생들과 통학버스 이용 눈높이 '맞춤 소통'

온 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경제 위기로 휘청거리던 1990년대 말, 지방대학들도 재정위기로 인해 힘든 상황에 처했다. 대학운영의 규모를 넓혀가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유지하는 것마저도 급급했을 때다.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려운 상황이 장기화될수록 나는 잠을 편히 못 잤다. 나의 이상과 포부가 이대로 지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폐교 위기에 놓인 중학교를 인수해 새로운 학교로 다시 발돋움하게 한 경험이 있다.

건양대는 처음부터 나의 육영사업에 대한 이상과 포부로 세운 곳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시점일수록 나는 책임감이 들었다. 학교의 구성원들도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나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마음으로 총장이 되기로 했다.

2001년 건양대의 네 번째 총장이 된 나는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설립자로서 가졌던 큰 이상을 실현하는 건 결국 작은 목표들을 하나씩,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이뤄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성 교육과 전문 교육을 더 강화하는 것은 물론, 학생의, 학생을 위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를 맞췄다.  
 
■학생은 나의 선생님= 총장이 된 후에도 나는 김안과와 건양대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정은 더 많아지고, 이동할 일도 잦았다. 그래도 자가용은 거의 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는 꼭 걸어 다니면서 주변의 상황에 귀 기울이는 게 여러 가지 영감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부득이 먼 거리를 오갈 때에만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오가는 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건양대(논산)에서 건양대병원이 있는 대전으로 움직일 땐 학교 통학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함께 탄 학생들과 학교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그들의 이야기 속엔 나의 눈으로만 보는 학교, 보고서로 들어오는 내용으로는 알 수 없는 현실이 담겨있다.

나는 실제 학교의 고객인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서야 비로소 깊이 공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곧장 주머니 속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그들의 목소리를 한 자 한 자 받아적었다. 하루를 마치는 저녁엔 학생들의 고충을 어떻게 덜어줄지 대안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실행에 옮겼다.

■이른 아침, 빵 나눠주는 ‘총장오빠’= 일이 점점 많아질수록 하루가 모자랐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쓸 수 있는 시간은 각자 만들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난 더 부지런해져야 했고, 나의 일들을 위해 기꺼이 부지런해질 수 있었다.

항간에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먼저 잡아먹힌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늦게 일어나는 새의 핑계라고 생각한다. 매일같이 저녁 9시에 잠들고, 새벽 3시쯤 일어났다. 학생들의 시험기간엔 빵을 한아름 안고 학교로 간다.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나의 대학시절이 떠올라 뭐라도 챙겨주고 싶다. 작은 빵이지만 응원이 되길 바랐다.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주머니 사정이다. 아낀다고 아껴도 반드시 나가는 돈이 대중교통비다. 먼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겐 생각보다 꽤 부담되는 비용이다. 그래서 2004년 학교재단에서 10억원을 내놨다.

대전권 통학버스를 전면 무료화한 것이다. 통학하는 학생이 많은 지역을 우선 고려해 차차 전주와 익산 방면까지 넓혀나갔다. 거리가 멀고 이용하는 학생이 많은 서울과 천안은 통학버스 비용의 절반을 지원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한국전쟁으로 황폐하고 사람들도 정신적으로 피폐했다. 그래서 놀이를 문화로 인식하는 건 어려웠다. 그렇지만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다.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하게 즐기는’ 게 중요하다. 학생들의 놀이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학교에서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교내에 만든 노래방과 칵테일 바는 학생들이 직접 제안한 곳이었다.

대학 안에 노래방을 만든다는 게 다소 파격적이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칵테일은 학생 한 명당 한 잔으로 제한했다. 이후에는 스포츠 활동도 취미활동으로 좋을 것 같아 탁구대, 당구대, 멀티미디어 오락기를 갖춘 스포츠랩, 펀랩(fun lab)을 만들었다. 이밖에도 풋살 경기장과 골프 연습장 등은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해방구였다.

반복되는 담배꽁초 줍기 이젠 모두가 동참해
대학 건강하게 일궈준 구성원이 내겐 '선물'

 
■담배꽁초 줍는 총장, 금연하는 학생들= 학생들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청결과 몸과 마음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금연캠퍼스를 만들기로 했다. 일단 나부터 담배를 끊었다. 학교 곳곳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도로를 깨끗하게 했다.

총장이 담배꽁초를 줍고 있으니 이 광경을 처음 본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불편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모습도 매일 반복되니 어느 순간 함께 꽁초를 줍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진해서 금연을 시작하는 사람도 생겼다.

이처럼 실천의 시작은 자신부터가 맞다. 그렇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대학이라는 큰 조직을 이끌고 가기는 너무 힘든 일이다. 나는 총장이라는 위치에서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각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부탁도 하곤 했다. 때로는 직접 그 역할 해보기도 했다.

나와 부총장, 보직 교수들은 다함께 일일 미화원이 됐다. 학교를 위해 귀한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학교 인근 상점과 하숙집, 복덕방 주인 등도 만났다. 식사자리를 마련해 우리 학생들 주머니 부담을 덜어주고 따뜻하게 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인근 원룸의 주인들은 건양대 ‘명예사감’으로, 교수와 학부모는 ‘교외사감’으로 위촉해 학생들의 안전과 건강을 챙기게 했다. 특히 자취방의 상태를 점검하고, 청결과 안전 인증서를 교부해 홈페이지에 소개했더니 인증 받은 하숙집의 인기가 높아지기도 했다.

대학은 마치 숲을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건강한 생명력이 풍성한 숲을 이룬다. 우리 대학을 건강하게 일궈준 구성원들의 노력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앞으로도 더 밝은 건양대를 만들어갈 것이다.

<정리=이은진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 이 시리즈는 대학 창립자가 초기 건학이념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참 교육자’를 발굴, 소개하고자 8부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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