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쁜 세상살이로 그간 잊고 있던, 묻고 있던 생각과 말들을 끄집어내 새롭게 재해석해줄 <강위석의 ‘생각을 따라 말을 따라’>를 연재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좇아가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건 어떨까.

‘짐승 같은 놈!’이라는 욕설 뒤에는 짐승이 사람에 비해 도덕 감정과 지능에서 절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인간의 우월감이 깔려 있다. 종교적 강박관념도 이 우월감을 받혀 주는 데 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너그러운 선(禪)불교조차 개나 고양이에게는 불성(佛性)이 없어 깨달음이 없다고 단언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기독교의 천국에 해당한다.

한편, 기독교는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더 좋은 말로 사람으로 태어난 이 번 윤회(輪回)에서 꼭 성불(成佛)하자고 권면한다.

그러나 이런 진언(陳言)은 사람에게는 설교이지마는 그 바깥의 존재에게는 배제(排除)의 선포다. ‘동물들아, 구원이나 성불이 너희들에게는 가당치도 않다’는 배제 말이다.

인간 사회 안에 설치한 세분되고 세련된 윤리적 행위가 동물의 세계에서는 무시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인간은 부러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짐승’같은 짓을 짐승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데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이다.

이런 배제, 선망(羨望), 공포감이 들어서 인간이 공격적인 경멸을 동물 세계에 퍼부을 수 있게 하는 감정적 토대를 마련한다. 필요 이상의 게걸스러운 육식과 동물 학대를 정당화하는 유인최귀(唯人最貴: 오직 인간이 가장 고귀하다)적 권력 의식(意識)을 정당화 시켜 왔다.

인간이 육식을 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모든 생물은 먹이 사슬에 참여한다. 사람을 포함한 포식(捕食)동물은 산 것을 잡아먹고 부패박테리아는 죽은 것을 먹는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도살을 하던 사체를 먹든 모든 삶은 다른 삶의 몸을 먹는다. 이것이 외부로부터 영양을 공급 받아야 사는 생태계의 개방성이다.

티베트 불교도들은 까마귀가 살생을 기피하여 사체(死體)만을 먹는다고 해서 거룩한 새로 떠받든다. 자기들도 기꺼이 육식을 하지만 도살을 하는 대신 자연사한 동물의 고기만을 먹는다. 반면, 후투티는 머리 깃털과 날개는 무척 아름답지만 산 벌레를 잡아먹는 새라고 해서 언짢게 여긴다.

이런 감정과 문화를 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척박한 자연 환경의 티베트 고원에서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한 도살이 정착하면 가축 자원은 쉽사리 고갈된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인도인이 소를 숭상하는 것은 소라는 자원을 아끼기 위한 생각에서 왔다고 본다.

그러나 티베트 문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까마귀, 독수리, 하이에나 등을 짐승 가운데서도 특히 더러운 축으로 여긴다. 지나간 약 3천년 동안의 대세는 한마디로 이런 마초(macho)적 문화였다.

권력, 승리. 정복, 성공, 이성(理性), 윤리, 구원(救援), 깨달음 등이 모두 약한 것, 어리석은 것, 게으른 것을 업신여기고 강한 것, 지혜로운 것, 부지런한 것을 숭상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약 500년 전부터는 여기에 과학이 가세하였다.

20세기 말은 이 대세에 반성이 일기 시작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여성이 남성 이상으로, 감성이 이성 이상으로 중시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점만 강조하기 보다는 짐승의 한 종류로서 생존· 진화하고 있는 점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자연은 정복하고 지배하기 보다는 보호하고 그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불어나고 있다.

< 한국대학신문 >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