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쁜 세상살이로 그간 잊고 있던, 묻고 있던 생각과 말들을 끄집어내 새롭게 재해석해줄 <강위석의 ‘생각을 따라 말을 따라’>를 연재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좇아가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건 어떨까.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즈음부터 일제는 조선어문(朝鮮語文)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하여 조선어학회(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함. 뒤에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그 이름이 차례로 바뀌어 오늘에 이름.)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과 연대하여 조선말과 한글을 가르치는 운동에 나섰다.

일제가 패망을 수삼년 앞두고 1942년 ‘조선어학학회 사건’이라는 대옥사를 일으킨 것은 이들의 조선어교육 운동이 애국 내지 독립운동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목도 내란죄로 붙였다. 33명이 검거되었고 그 중 2 명은 옥사에까지 이르렀다.

이들 33인 가운데는 자신들이 이끄는 조선어 교육 운동의 애국적 측면을 문화적 측면보다 우위에 놓았던 사람이 적지 않았을 성 싶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적 측면에는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문화적 재산이라는 개인 중심적 인식이 깔려 있다. 정보와 정서를 창조, 유통, 저장, 평가하는 마치 화폐와 같은 기능을 가진 재산 말이다. 애국적 측면은 조선어를 조선국과 동일시하는 인식이다.

조선어를 말살해야겠다고 작정하고 그 실행에 나선 것을 보면 일제의 무지(無知)와 협량(狹量)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식민지 언어를 말살해야 식민지를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의 고유 언어가 이전 시대처럼 사용되고 있는 데서 오는 이질감을 참아 낼 수 있는 도량이 종주국으로서는 더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 언어가 사멸(死滅)하는 데는 2개 언어의 병용 단계를 거치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이 기간에 언중(言衆)은 두 언어의 효용과 비용을 경험적으로 평가하게 된다. 평가 결과 효용이나 품위에서 더 우수하고 배우고 사용하는 데는 더 수월한(비용이 적게 드는) 언어로 다른 하나가 서서히 흡수‧동화되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한어(韓語)는 수천년 동안 막강한 중국 문화의 이웃에 있어 왔으나 언어사멸을 겪지 않았다. 한어에는 수 많은 중국어 단어가 그대로 사용되어 왔고 (한글 창제 이전까지는) 전적으로 중국문자를 그대로 썼음에도 말이다.

나는 해방 후 학자들과 정치 세력이 연대하여 한글 전용과 표준말 사용을 강압해 온 점을 좋게 생각하지 못 한다. 이 강압은 학교 교육과 취직 시험 등을 통하여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이루어졌다. 만일 한자(漢字)와 사투리를 한어(韓語)에서 몰아 낸 것이 언중(言衆)의 선택이었더라면 아무도 거기에는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혁명은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일제가 조선어를 말살하려고 했을 때 거기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던 한국의 가장 자랑스러웠던 지식 엘리트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언중의 것인 어문(語文)을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여 언중이 그 선택을 따르도록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 강제성이 아무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과 어금버금하다.

언어는 원천적으로 국가나 정부의 것이 아니다. 한어 가운데 서울의 중산층이 쓰는 말은 표준어,‘바른 말’로 모시고 지방에서 쓰는 말은 사투리,‘틀린 말’로 낙인찍을 권한이 문화관광부, 국어심의 회의, 국립국어원에는 없다.

국어기본법 제13조의 규정에 의한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제정한 한글맞춤법, 표준어규정, 표준어발음법, 외래어표기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등 국어사용에 필요한 규범은 언중에게는 하나의 제안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다.

< 한국대학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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