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쁜 세상살이로 그간 잊고 있던, 묻고 있던 생각과 말들을 끄집어내 새롭게 재해석해줄 <강위석의 ‘생각을 따라 말을 따라’>를 연재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좇아가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건 어떨까.

시경(詩經)에 다음 같은 주(周)나라 초기의 시구(詩句)가 있다.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데가 없고(普天之下 莫非王土:보천지하 막비왕토)
땅 끝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은 없네(率土之濱 莫非王臣: 솔토지빈 막비왕신)

중국의 역사학자 부락성(傅樂成)은 그의 저서 <중국통사>에 이 구절을 “찬송인지 개탄인지 풍자인지 알 수 없다”고 쓰고 있다. 문학 텍스트에서 역사의 진실을 놓지지 않으려는 참으로 지혜로운 코멘트다. 사람들은 이 짧은 시구(詩句)를 왕토(王土)사상이라고 거창하게 부른다.

이 시구가 들어 있는 소아(小雅)편 북산(北山)을 포함한 약 300여편의 시를 모아 시경(詩經)으로 편찬한 사람은 공자다. 그는 자신 보다 약 6백년 앞 시대인 주나라 초기를 소강(小康), 다른 말로 승평(升平)이라고 보았다.

현 중국공산당도 소강사회 건설을 목표로 걸고 있다. 소강의 대칭은 대동(大同), 다른 말로 태평(太平)이다. 공자는 초기 원시공동체 농업 사회이던 요순(堯舜)시대를 태평 사회였다고 보았다. 노자의 언어를 빌리면 태평은 무위(無爲), 소강은 유위(有爲)라 할 것이다. 태평과 소강은 치세(治世)다. 그 반대는 난세(亂世)다.

공자는 태평을 다시는 실현할 수 없는 옛 성인(聖人)들의 세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태평성대가 더 이상 실현될 수 없게 된 까닭은 실은 그것의 바탕인 원시공동체 농업 사회가 인간의 번식력에 걸맞을 만큼 충분한 식량을 공급할 수 없어 일찌감치 괴멸했기 때문이다.

그 후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 중국인들은 치수(治水), 관개(灌漑) 사업을 진행시켰다. 주대에 와서는 관개 농업이 일반화 하였다. 토지의 소유는 왕, 제후, 대부에 이르는 3 계급 만 가능하였다. 왕의 토지가 제후에게 분봉(分封)되고 제후의 토지가 대부에게 분봉되는 형식을 취했다. 소유권의 순차적 위탁인 셈이다. 이론상 왕은 분봉된 토지를 언제라도 회수할 수 있다.

그래서 천하의 모든 땅은 왕의 땅이고 모든 사람은 왕의 신하라는 언설(言說)이 성립하게 된다. 귀족의 말단인 사(士) 계급에게는 녹봉만이 주어졌다.

서인(庶人)에게는 경작권만 있었다. 경작권은 상속은 가능했으나 양도나 매매는 불가능했다. 이것이 사전(私田)이다. 주나라의 이른바 정전(井田)제는 농토를 사전과 공전(公田)으로 구분하였다. 공전은 서인이나 노예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소유주인 귀족이 직접 경작하였다.

이런 정치 경제 제도가 주(周)의 봉건제도다. 이 제도 아래서 인민의 생활이 평화롭고 안정되고 번영하던 시기가 곧 공자가 생각하던 이상 사회인 주공(周公) 치하의 소강이었다. 공자가 왕토사상을 찬송으로 받아 들였을 것 같지는 않다. 왕토 사상에는 봉건제도 보다는 오히려 중앙집권적 절대 왕권이 암시되고 있다. 왕토사상을 실현한 것은 진한(秦漢) 제국 이후의 전제 왕조들이었고 중국공산당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잘 실현하고 있다.

앞의 시구에는 4 개의 키워드(key word)가 들어 있다. 천하, 왕, 땅, 신하가 그것이이다. 왕은 정치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땅은 경제 또는 자원이란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신(臣)은 물론 인민이다. 그렇다면 정치가 인민과 경제를 지배하자는 것이 곧 왕토사상이겠다. 여기까지는 중국의 국내 문제다.

4 개의 키워드 가운데 남은 한 가지가 천하다. 천하는 중국 만을 뜻하는가, 외국도 포함하는가. 천하가 막비왕토(莫非王土)라는 말은 중국의 국내문제로만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

< 한국대학신문 >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