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록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안녕들 대자보’에 대해 아시겠지요. 한 대학생이 대학 게시판에 써붙인 대자보 한 편이 우리 사회를 강타했습니다. 순식간에 각 대학, 고등학교, 아파트 등에 이 글과 관련한 대자보가 요원의 불길처럼 붙여졌습니다. 학생이 쓴 대자보를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콧등이 찡하다못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런데도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먼저 자식뻘인 수많은 대학생에게 미안했습니다. 소통 불통의 사회에서 젊은이들의 마음앓이가 이 정도인가 싶어 안타깝고 안쓰러웠습니다. 얼마나 대화에 굶주리고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손편지로 ‘안녕들 하시냐’고 물어보았겠습니까?

우리는 그 물음에 대답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 친구들이, 선후배들이, 나아가 학부모들이 ‘어찌 안녕하겠느냐’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밝혔겠지요. 한 엄마는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하고, 한 선배는 ‘힘내라. 너희 잘못이 아니다’고 했더군요. 어느 대학은 ‘안녕 촛불집회’를 열어 서로 고민을 털어놓는 ‘열린 마당’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물결이라고 하면 쓰나미(지진해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저력일까요? 엄혹한 정치나 경기불황 가운데에서도 역시 “젊은이는 살아 있네”를 느꼈습니다.

여권은 야권이 ‘안녕 대자보’를 역이용할 것을 우려하고, 보수신문은 대자보를 작성한 대학생이 진보당 출신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럴 문제인가요? 그저 모두 안녕들 하시냐고 물었을 뿐인데 종북이네, 진보네 하는 해석이 뒤따라야 하나요? 안녕하면 안녕하다고, 안녕하지 못하다면 불편하다고, 괴롭다고 자신의 의견만 밝히면 되는 게 아닌가요? 답변할 필요가 있느냐며 깔아뭉갤 수는 없는 물음이 아닌가요? 이유있는 항변인지, 아니면 넋두리인지만 따져보면 금세 알 수 있지 않나요? 끝부분에는 살짝 글쓴이의 위트까지 보이더군요.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그에게 대답해 줍시다. ‘당신이 안녕치 못하는 모양인데, 우리도 안녕치 못하다. 그러니 언제 한번 가슴을 활짝 열고 이야기해보자’ 아니면 ‘나는 안녕한데, 안녕치 못하는 것은 당신 탓’이라고라도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답변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우리의 자식이 답답해 죽겠다고 호소하는데, 침묵이 미덕은 아니겠지요. 밀물 같이 쏟아지는 답변들을 보면 대다수 국민이 안녕하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게 할 ‘대책’을 하루빨리 세우고 추진해 나가는 게 정치가 아닐까요? 각종 ‘위원회’는 잘 만들면서 ‘안녕회복 긴급대책위원회’는 만들지 않나요? 몇 년 전 같은 대학의 ‘김예슬’이라는 학생이 ‘나는 대학을 포기한다’는 대자보를 붙인 후 자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반성은 잠깐이었던 게 기억납니다.

이번 역시 그렇게 될까요? 한 젊은이의 절박한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는 게 교육이고 정치인가요? 해답의 열쇠는 어쩔 수 없이 ‘정치’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심히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그저 ‘내 아들만 취직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못난 어른을 반성하게 하는 그 친구에게 당당하게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어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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