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신학교로 출발 ‥ 故 김수환 추기경 배출

1990년대까지의 ‘효성여대’, 여성 인재 양성 주도
효성여대-신학대, 대구가톨릭대로 ‘발전적 통합’

대구가톨릭대가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는 격변을 거듭한 역사 탓에 대다수 대학의 역사가 그리 길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구가톨릭대의 100년은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한 세기를 오롯이 견뎌온 대학에는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대구가톨릭대의 100년을 통해 변하지 않는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가치와 정신, 비전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한국대학신문 이우희 기자] ‘100년 대학’이 된 대구가톨릭대는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 대학의 수는 사범대학을 포함해 불과 29개교뿐이었다. 암담한 고등교육 현실에서 수많은 사학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미래를 위한 인재양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학이 없는 고등교육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대구가톨릭대는 김수환 추기경을 배출한 가톨릭 사제 양성의 요람에서 시작해 여성교육의 리더 역할을 거쳐, 이제는 국내 최고의 교육중심대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 세기를 이어온 대구가톨릭대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기록이다.

▲ 한 세기를 이어온 대구가톨릭대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기록이다. 성유스티노신학교 교정(1919), 확장공사 후 성유스티노신학교(1922), 방학을 마치고(1923), 약학과 수업(1961), 화훼원예학과 재학생들(1970), 첫 스쿨버스 운행(1970), 교내 방송실(1977), 지리교육과 수업(1981), 하양캠퍼스 외국어대학 수업(1992). (이하 사진=대구가톨릭대 제공)

■김수환 추기경 배출한 영남 최초 ‘100년 대학’ = 대구가톨릭대는 영남지역 최고(最古) 대학이다. 올해는 영남권 최초의 ‘100년 대학’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시작은 소박했다. 일제강점기가 막 시작된 1914년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의 파리 외방선교회가 대구가톨릭대의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학생 정원 50명의 작은 교육기관으로 출범했지만, 이 시기 대구가톨릭대는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을 정도로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일제강점기 강제 폐교 전까지 67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했다. 최초의 신학교 유학생도 이곳에서 나왔다. 무엇보다 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년)이 바로 성유스티노신학교 출신다.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한 김수환 추기경은 군위보통학교를 거쳐 1933년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쳤다. 이 같은 인연으로 대구가톨릭대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지 40일 뒤인 2009년 4월 28일 효성캠퍼스에서 故 김수환 추기경 추모의 밤 행사를 열었고, 2013년에는 CU갤러리에서 선종 3주기 추모 사진전을 갖기도 했다. 이번 100주년 기념품에도 김수환 추기경이 환하게 웃는 캐리커처와 ‘사랑하며 사세요’라는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 1961년 수업 장면.

■여성교육의 리더, 효성여대 = 영남지역에서의 대구가톨릭대의 명성은 효성여대 시절 이미 꽃을 피웠다. 대구가톨릭대는 일제의 강압통치 아래 1945년 강제 폐교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해방 후 1952년 효성여자초급대학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좀처럼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던 당시 시대 분위기 속에서 효성여대는 영남권 여성교육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효성여대의 위상은 ‘한강이남 최고의 여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효성여대 약학과는 1953년 대구‧경북지역 최초로 개설된 이래 61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효성여대 약대 출신 동문들의 자부심과 긍지는 대단하다. 실제로 지난해 대한약사회 신상신고 회원 현황에 따르면, 대구가톨릭대 출신(효성여대 포함) 약사 회원은 전국 약사 3만813명 중 1441명으로 4.7%(10위)를 차지하고 있다. 개교와 함께 개설된 3개 학과(국문학과, 가정학과, 음악학과) 중 하나였던 음악학과 역시 영남지역 음악인재 양성의 메카였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를 비롯해 교수와 교사 등 교육 분야의 동문들이 많다.

이 시기 효성여대 교수 중에는 명사(名士)들도 많았다. 안중근 의사의 장녀 안현생 여사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3년간 문학과(불문학 전공)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교직원의 재직 기록이 담겨있는 사령원부(辭令原簿)에는 안 여사 뿐 아니라 시인 조지훈 선생과 구상 선생이 함께 재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안 여사가 교수로 임명되던 해 조지훈 선생은 전임강사로, 구상 선생은 부교수에 임명된 것으로 적혀 있다.

■ 대구가톨릭대로 ‘발전적 통합’ = 1980년에 6개의 단과대학을 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여자대학으로서의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효성여대는 이후 캠퍼스 이전 종합계획에 따라 봉덕동 캠퍼스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하양캠퍼스 시대를 열게 된다. 1990년대 들어 점차 남녀공학 노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효성여대와 학교법인 선목학원 대구가톨릭대가 학교법인 선목학원 대구효성가톨릭대로 통합돼 제2의 발전적인 도약을 기약하게 됐다. 이후 교명이 2000년 대구가톨릭대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의대가 신설(1990)된 것도 이때였다. 현재 대구가톨릭대는 간호학과와 물리학과, 방사선학과 등 의약·보건·생명계열 학과를 완벽하게 갖춰 특화에 성공한다. 1995년에는 공과대학이 신설되면서 명실 공히 종합대학으로서의 교육기반을 완성했다. 이로써 현재 대구가톨릭대는 전국 가톨릭계 대학 중 최대 규모가 됐다.

▲ 지난해 성대하게 치러진 대구가톨릭대 '소통과 화합의 밤' 동문 행사


■ ‘100년의 열망’ 다양한 백주년 행사 = 개교 100주년을 맞아 대구가톨릭대는 그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고 느슨해진 동문간 결속을 다지는 소통과 화합행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새로운 100년을 열기 위해선 지난 100년의 역사를 함께해온 동문간의 소통과 화합이 발판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홍철 대구가톨릭대 총장은 “100년 역사를 가진 대학이 별로 없는데도 그간 대구가톨릭대는 동문 행사에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며 “지난해 서울과 대구에서 수백 명이 함께한 동문행사를 잇따라 개최하고, 지난 1월에는 무려 1000여명이 참석한 신년교례회를 성대하게 치르는 등 소통과 화합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대구가톨릭대는 100주년 기념 사업단을 구성하고 전용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등 체계적인 로드맵을 구상해 이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 중점 기념사업으로 지상 15층 지하 1층 규모의 신축기숙사가 지어질 예정이며 단과대학 리모델링 사업을 완료했다. 100주년 관련 자료 및 각종 예술작품을 전시하게 될 ‘개교 100주년 역사기념관’을 조성하고 있고, 4월에는 2만2000㎡에 기념조형물과 바닥분수, 야외무대 등으로 구성되는 ‘개교 100주년 기념광장’도 완공될 예정이다. 4~5월에는 주요행사가 몰려있다. 4월 26일 대학구성원과 지역민, 동문, 학부모까지 함께하는 ‘개교 100주년기념 대음악회’를 열고, 5월 15일에는 메인 이벤트인 ‘100주년 기념 미사 및 기념식’을 통해 지역민과 함께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 성찰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개교 이후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대학 100년사’도 편찬하고 있다.

[인터뷰]김계남 대구가톨릭대 총동창회장(약학 12회 졸업) " ‘100년 대학’ 동문으로 무한한 자부심과 애정"

“과거 여대 프리미엄에 약학과 명성으로 영남전역서 유학와”

- 전신 효성여대가 당시 ‘한강이남 최고의 여대’라는 명성을 누렸다.
“당시에는 딸을 가진 부모님들이 남녀공학보다는 여대를 선호하셨어요. 그 시절 대구에는 국립대인 경북대가 있었고 등록금도 효성여대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 분위기가 남녀를 구분하고 있었고, 딸을 현모양처로 키우고자 하는 부모들은 입학성적이 더 높아도 일부러 여대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특히 효성여대 약학과는 부산대보다 먼저 설립돼 멀리 김천과 안동, 부산에서까지 유학을 왔습니다.”

- 효성여대의 학풍은.
“굉장히 엄했어요. 교복이 있었는데 지금도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를 입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굽 높은 구두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기 때문에 학습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금했습니다. 또 60년대 얘기지만 당시에는 재학 중에 결혼을 하면 학교를 나가야 했어요. 학교는 행사를 열더라도 남학생들이 올 수 없는 ‘금남의 집’이기도 했습니다.”

-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대학의 총동창회장으로서 감회는.
“사람과 나무, 건물 등에 있어 100년이란 시간은 쉽게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입니다. 그 세월에는 많은 어려움과 기쁨, 슬픔이 쌓여 있지요. 우리학교라고 어려움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우리학교는 뒷걸음치지 않고 조금씩 굳건히 성장해 왔고, 오늘날 100년에 이르렀어요. 8만5000명 동문은 다른 어떤 대학 동문보다 더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 통합 교명이 대구가톨릭대로 바뀌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들 귀에 익은 ‘효성’이라는 이름이 빠진데 대해 학교 측에 섭섭함을 많이 표현했지요. 지금은 다 화해했습니다. 이제 하나의 ‘대가대(大家大)’가 됐고, 결국은 모든 것이 우리가 더 발전하기 위한 하나의 고통이었다고 생각해요. 동문 전체는 모교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바탕으로 훌륭한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 홍철 총장이 이끄는 대구가톨릭대는 어떠한지.
“총장님은 지금까지 정부부처와 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CEO를 하셨던 분입니다. 그 모든 곳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대구가톨릭대에 쏟아 붓고 계신 것이 느껴집니다. 동문들 입장에서는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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