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대한민국 시간강사의 현주소

기존의 교수진을 대체할 ‘학문후속세대’로서의 시간강사. 학생들과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뤄내는 수업방식. 이들에게서 대학 교육의 희망을 찾아보자는 게 애초의 취지였다. 하지만 강사들을 만나면서 시간강사들이 처한 녹녹치 않은 현실을 뒤로 한 채 희망을 끄집어 낸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2002년 10월 초, 이틀에 걸쳐 만난 시간강사 네 명에게서 우리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현위치를 가늠해본다. <30개 직업 중 결혼상대 순위 29위> 10월1일 오전 8시20분 동국대 후문. 소매를 둘둘 걷어붙인 연회색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받쳐 입고 가방을 가로 멘 양문석 씨는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로 향했다. 지난 2월 언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양 씨는 지난 95년 석사 4학기부터 강의를 다니기 시작해 올해로 경력 7년차 시간강사다. 이번 학기에는 동국대에서 3학점짜리 강의 하나만 맡았다. 나머지 시간은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 정책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8시30분, 동국대 정보문화관 402호. 양 씨가 맡은 0.5교시 ‘매스컴과 사회’는 수강인원 1백50명의 교양강의다. 오늘 수업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제로 한 특강이다. 강사는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으로 화제를 모은 서울대 나동혁 군. 이번 특강은 몇몇 학생들의 요청으로 성사됐다. “선생님 강의는 살아있는 것 같아요. 저돌적인 수업방식은 학생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죠. 저는 잘 발표는 하지 않지만 항상 말하고싶은 욕망이 여기서 꾸물거려요.” (선문 스님·동국대 불교4) 양 씨 강의의 특징은 ‘생동감’이다. 수업 내용은 항상 시류에 발빠르다. 얼마 전에는 인기를 모으고 있는 MBC일일드라마 ‘인어아가씨’를 분석·토론했고, 방송사의 ‘가을편성’에 대한 강의도 진행했다. 온라인 강의도 병행한다. 다음 강의에 대한 과제를 주고 게시판에 글을 올리도록 해 사전에 생각을 정리하도록 만든다. 그래야 활발한 토론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맡은 강의는 일주일에 3시간뿐이지만 강의를 위한 홈페이지 관리 등 온라인 활동과 수업 준비시간까지 치면 1주일 내내 걸리는 셈이다. 강의를 마친 그는 학교 앞 우동집에서 늦은 아침을 해결한다. 교수가 되고싶은 욕심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차세대 대학교육의 주역’으로서의 시간강사를 조명하겠다는 기획의도로 설득한 후에야 동행을 허락한 그였다. 하지만 현재 시간강사들이 처한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는 공허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몇년 전에 여성이 선호하는 결혼상대자 직업별 순위를 발표한 걸 보고 충격을 크게 받았죠. 30위까지 순위를 냈는데 시간강사는 29위입디다. 30위는 농민이구요.” <건강보험증도 없는 직장인> 같은 날 오후 2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후문. 한 시간강사의 단식농성이 시작됐다. 농성의 주인공은 김동애 전 한성대 대우교수. 김 전 교수는 붉은 바탕에 검정색으로 ‘교육부는 대학강사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라’는 구호를 적은 피켓을 옆에 두고 정부종합청사 맞은편 가로수 아래 자리를 잡았다. 꼬박 1주일 단식농성을 마음 먹은 김 전 교수는 시간강사 최초로 ‘퇴직금 청구 소송’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김 전 교수는 지난 91년 42세 나이에 대만사범대에서 중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92년 한성대 대우교수로 임용됐다. ‘대우교수’ 신분인 김 전 교수는 교육부에는 전임교원으로 보고됐지만 실제로는 일반 시간강사료의 2배만을 지급받았을 뿐이다. 그러던 지난 99년 대학은 김 전 교수를 강사로 신분을 변경시켰고, 김 전 교수가 이에 대해 ‘직위해제 무효소송’을 진행하던 2000년 8월에는 사전예고 없이 해고했다. 강의 배정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노동부는 해고예고, 근로조건저하, 퇴직금을 원하는 김 전 교수의 진정에 일부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 해당 대학 전 이사장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검찰은 해고예고제 미실시, 근로조건저하 등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진행된 이사장 고발건에 대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서 기각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부는 “시간강사는 주당 15시간 미만의 단시간 근로자이기 때문에 퇴직금 지급 대상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 전 교수는 이같은 판결에 불복, 지난 4월 퇴직금 청구소송을 재개했다. 불리한 조건인 줄 알면서도 ‘교수의 꿈’을 가지고 달려들었다. 기본적 사회보장제도인 4대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대학에서 강의를 배정하지 않으면 속수무책 해고되는 셈이다. 그러나 퇴직금은 바랄 수도 없다. 김 전 교수의 사례야 말로 시간강사들이 놓인 구조적 문제의 결정판이다. 김 교수의 판례는 앞으로 강사들 처우 개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교육부가 나서야 합니다. 시간강사의 불합리한 처우 문제가 바로 여기 있잖습니까. 교육부는 시간강사를 ‘교원근로자’로 명문화 하고, 재판부와 검찰이 법리적으로 대학강사의 ‘교원성’과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합니다.”김 전 교수가 고집스레 단식농성을 주장한 이유다. 김 전 교수도 처음부터 ‘투사’는 아니었다.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 유학 길에 올라 마흔둘에 박사학위를 따서 한성대 대우교수로 임용될 때까지만 해도 “1년 후면 교수로 채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있었다. 하루에 8시간 강의도 했다. 대전·강원 등 4개 지역 대학 강의를 하루에 해결했던 적도 있었다. 강의와 함께 집안 일도 도맡아야 했다. 학위 받은 지 5~6년째까지는 매 방학마다 각 대학 교수 채용에 제출한 서류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여러차례 면접까지도 갔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암암리에 대상자를 내정하고 있는 채용심사에서 들러리만 선 셈이다. 연구실 없는 ‘보따리 강사’ 노릇만 10년 가까이다. 소송을 위해 정산해 본 퇴직금은 기껏해야 8백만원. 4대 보험은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의료보험은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딸에게 얹혀있다. 교육부 실무자들이 농성장으로 내려왔다. “시간강사 문제 해결은 대통령 지시사항인데다 장관도 관심이 무척 많은 분야입니다. 우리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정부종합청사에서 피켓시위를 해온 김 전 교수의 사례를 오늘 처음 알았다는 교육부 실무자에는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다시 길 건너 정부종합청사 후문을 바라보고 앉았다. 김 전 교수가 기대고 있는 가로수 밑둥에는 베이지색 모포가 담긴 녹색 배낭과 파란색 침낭이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있다. 그 앞으로는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어대며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다. 이렇게 일주일을 낮에는 교육부에서, 저녁에는 한성대에서 진을 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강사들 수업이 내용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것 아닙니다. 시간강사도 고등교육법상 교원 지위에 넣어주세요. 이미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건 강사들 아닙니까?” <‘경제적 무능력’ 10명중 4명 이혼당해> “대학강사들을 ‘학문후속세대’로 보면 안됩니다. 정규직 교수들이 학문을 리드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돼요. 현재 대학교수와 강사들의 지적능력은 동일 수준이에요. 요즘에는 연령도 비슷하고, 하는 일도 같죠.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고용형태 뿐입니다.” 최근 노동계 화두가 되고 있는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별문제. 영남대 시간강사 윤병태 씨는 대학 시간강사의 문제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동일자격, 동일노동’이면 ‘동일지위, 동일임금’이라는 노동법의 근본 원리가 대학 강사에게는 먼 얘기라는 것이다. “대학의 비정규직제도, 시간강사제도는 자본가의 자본 축적 방식. 즉 헐값으로 대학교육을 충당할 수 있는 방편”이라는 지적이다. 10월4일 오후 4시. 김 전 교수의 새로운 시위장소가 된 한성대 이사장실에서 만난 윤병태 씨는 올해로 마흔 둘, 인류학 전공의 강의경력 9년째 시간강사다. 현재 영남대·경북대서 강의를 맡고 있는 그는 김 전 교수의 단식농성에 지난 2일부터 합류했다. “교양강의 성적 낼 때는 온 가족이 비상이에요. 아내는 물론 심지어 어머니까지 매달리죠. 걷어온 리포트를 대학별·과목별·종류별로 분류하고, 점수 매기면 기록지에 옮겨주고 이런 단순업무는 가족들 몫입니다.” 한번은 한 학생이 제출한 리포트를 빠뜨려 A+가 나가야 할 학생에 B+를 주는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학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 대학에서 강사들에게 대부분 교양강의를 맡기는 이유는, 전공강의보다 잔손이 많이 가고 힘들기 때문이다. 채점 기간은 방학 중. 십여일 중노동을 하지만 채점비는 따로 지급되지 않는다. 윤 씨가 뼈 있는 농담처럼 강사 생활담을 풀어내자 옆에 있던 김미선 씨(가명·ㅇ대 시간강사)도 거든다. 대학명과 이름을 밝히지 말기를 당부하던 그는 올해로 경력 3년차 시간강사. 박사과정 진행 중이다. 대구·경북지역 거주자인 그는 한 때 아산 소재 대학까지도 강의를 뛰었다. 하루에 오전에는 아산 소재 대학에서, 저녁 8시에는 다시 대구지역 대학에서 강의를 해내야 했다. 그나마 애초에 차비 10만원을 주기로 했던 그 대학은 별다른 이유 없이 4만원으로 대폭 감축했다. 하루 차비와 식사까지 4만원이 웃도는 비용을 들이며 강의했고, 고된 강의 일정으로 수입은 모두 약값으로 탕진했다. 김 씨의 한달 평균 수입은 50만원. ‘용돈벌이’ 수준이다. 아직 미혼인 관계로 부모님이 보조해주는 실정이지만 수입이 전무한 방학 때는 중·고등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로 연명한다. 그나마 김 씨는 나은 편이다. 김 씨에게 전해듣는 강사들의 생활상은 더욱 끔찍하다. 특히 남자 강사들은 심각한 가정문제로 흔들리고 있다. 한 대학 인문학 관련 학과 소속 10명의 남자 시간 강사 중 4명이 경제적 무능력 등을 이유로 이혼 당했다. 그들은 동료 여 강사들에게 “시간 강사 만나지 마라”고 충고한다. 방학이 끝나고 강의가 시작되는 9월, 일부 사람들은 이때는 사정이 좀 펴지 않느냐지만 모르는 소리다. 강의료가 한달 뒤에나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처럼 9월에 명절이라도 낄라치면 상황은 더욱 암담하다. 생일이 방학이면 미역국 먹을 낯도 없다. “‘교수를 하고 안하는 건 하늘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저 공부하고 학생들 만나는 게 좋을 뿐이죠. 기회가 주어지면 교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맹신하지는 않습니다.” 한창 공사중인 한성대에는 소음이 가득하다. 이사장실 밖에서는 무단 점거자(?)들에 항의하는 교직원과 점거자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시간은 오후 6시를 훌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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