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정치가가 기쁨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실상 그 기대를 실현시켜주는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우리 시대에 그런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역사정치학자 진덕규 교수와 함께 이 시대의 진정한 정치가의 역할과 모습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지금은 사라진, 그것도 산업화의 거센 바람에 휩쓸려 시멘트 아래로 파묻혀 버린 우리 동네를 마음속에 되살릴 때가 많다.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한촌인 우리 동네 뒤편에는 숭구실이라고 불리던 야트막하고 작은 솔밭이 있었다. 본래 이름이 순국실(殉國室)이었는데 그곳에는 노송이 몇 그루 서 있었다. 순국실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었다. 그때 그 사당 주변에 심었던 소나무들이 자라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사당은 오래 전에 소실되었고 동네회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때로는 읍내 관리들이 동네회관에 찾아와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특히 추수가 끝난 늦은 가을이나 보리타작을 마친 6월이면 관리들은 어김없이 공출이라든가 하곡수매라는 명목으로 동네 사람들이 추수한 곡식을 거둬가곤 했다. 사람들은 수확한 곡식을 지주에게도 바쳐야 했는데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날의 우울함을 순국실 소나무 아래에서 달래곤 했다.

순국실 소나무도 달래주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배고픔이었다. 해방된 다음해인 1946년의 봄은 유달리 따스했고 노란 개나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는데 그 노란 색깔만큼이나 배도 고팠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을 거르거나 시래기죽으로 끼니를 때웠기 때문에 그 해 봄에는 동네에서 밥 짓는 연기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학교에 가도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근처 냇가로 데리고 가서 갓 피어난 버들개지와 참꽃을 따먹게 했다. 끼니를 부실하게 먹은 아이들이라 버들개지를 잔뜩 따먹고 물을 마시면 배도 부르고 잠도 왔다. 선생님은 그런 우리를 따스한 양지쪽에서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자는 것으로 학교 공부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 시절 봄날의 학교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네 마을로 가는 길은 큰 산으로 막혀 있어서 평소에는 잘 가지 않았다. 그 친구네 기와집 마당에는 나무들도 보기 좋게 서 있었다. 우리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점심상이 들어왔는데 하얀 쌀밥이 차려져 있었다. 그걸 보자 엉겁결에 “늬네 제사 지냈구나!”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 친구 집을 나와 산을 넘어 오면서 길섶에 앉아 눈물을 훔치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 봄철에 우리 동네 사람들만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에 시달리는데도 불과 몇몇만이 배불리 먹는 세상은 사악하다. 이런 세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내거는 치졸함은 지배집단만의 강압적인 논리적 합리화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밥이 될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바람결에 펄럭거리는 찢어진 깃발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동네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순국실의 그 소나무들이 몇 배나 더 소중하다. 배고픈 우리를 달래줬던 따스한 손길도 순국실의 소나무였지 지배자나 정치가도 아니었고 그들이 내걸었던 이데올로기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 시절에는 국가도 이런 일에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다. 순국실의 소나무들은 지배자나 정치가들의 억압 속에 살고 있었던 우리 동네 사람들을 언제나 포근하게 안아주던 요순시대의 성군처럼 후덕한 모습을 지녔기에 그 소나무들이야말로 위대한 정치가 그 자체였다. 순국실의 소나무 아래에 앉아 그 소나무와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는 동네 어른들의 마음은 그 뒤에도 채워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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