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정치가가 기쁨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실상 그 기대를 실현시켜주는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우리 시대에 그런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역사정치학자 진덕규 교수와 함께 이 시대의 진정한 정치가의 역할과 모습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1. 선거의 풍경

기억을 되살리면,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1948년 5월 10일인데, 그날의 광경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동네사람들은 아침 일찍 동네회관 앞마당에 줄지어 서 있다가는 한 사람씩 회관 안으로 들어간 다음 읍사무소에서 나온 경찰과 관리, 청년단체 회원들이 나눠준 투표용지에다 기표한 후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나왔다.

그렇게 선거를 다 끝낸 그날 늦은 오후에도 순국실 소나무 아래에 모여 앉은 동네 어른들은 이런 저런 말로 세상을 한탄했다. “저 잘났다고 설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본 적이 없다”거나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된들 세상이 좋을 리 만무하지!”라는 말로 결론을 내린 뒤 순국실의 노송만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그 때는 세상 이치를 조금은 눈치 챈 나이였기에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자가 이웃 동네에는 흰 고무신을 돌리고 우리 동네에는 검정 고무신을 돌렸다는 불평도 나왔다. 심지어 “밤에 잘 때도 불을 켜 놓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는데,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집이라야 국회의원 후보자의 운동꾼들이 밀가루나 신발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그 때도 순국실 동네회관에서 투표를 했는데 투표가 끝나면 동네 어른들은 또 다시 순국실 소나무 아래에 모여서 이전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2. 국민방위군의 모습 

그 해 6월에는 한국전쟁이 터졌다. 우리 동네에도 서울 등지에서 피난민이 밀려들어 동네회관과 몇몇 집 아래채에다 피난 짐을 풀었다.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군부대가 점령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순국실 소나무 아래에다 칠판을 걸어야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안 나오실 때가 더 많아서 우리들끼리 모였다가 헤어지는 식의 일과만 되풀이했다.

그 뒤 우리 학교는 국민방위군이 차지했는데 그들의 몰골은 정말로 비참했다. 그들은 해진 군복과 군화를 신고 허기진 모습으로 절뚝거리면서 동네를 돌아다녔다. 학교 운동장 뒤편에 큰 솥을 내걸고 급식을 했지만 그것은 어린 우리가 봐도 너무나 조악했다. 일부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민가로 찾아와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나중에 그들에게 급식해야 할 식량이나 의복, 신발 등을 최고 간부들이 가로챘다는 천인공노할 죄상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는 허기진 병사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반역의 대범죄로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의 대열“로 몰고 갔는데 그 죄상을 생각하면 그 시절의 정치가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 시절에는 시골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러야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학생들은 이것에 대비해서 암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 장관 그리고 육해공군참모총장과 유엔군 총사령관및 미8군 사령관, 심지어 도지사 이름까지 모두 다 외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 중에는 이름도 들먹이고 싶지 않은 그렇고 그런 인사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을 대단한 지도자인 양 이름까지 외우게 했으니 왕조시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실로 그렇고 그런 인사들이 정치가로 나서서 세상을 휘저었던, 마치 한 토막 우화 같은 일들이 연출되던 시절이었다. 그들도 조선왕조시대의 사악한 벼슬아치나 그들의 앞잡이인 서리 아전과도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은 그 뒤에도 좀체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인사들이 정치가랍시고 설쳤으니 나라의 형편이 좋아질 리 없었고 백성의 고통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안중에는 백성이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개인적인 출세나 일문일가의 영화만을 전부로 여기고 입신양명으로 내달렸을 뿐이다. 이런 풍정이야말로 한 때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보여주었던 본 모습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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