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테네의 민주주의

페리클레스는 외국과의 승전에 힘입어 아테네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는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등이 이룩해 놓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터전을 더욱 단단하게 굳혀 놓았으며, 민중의 지지로 귀족의 이익을 대변했던 키몬을 비롯해 에피알테스, 뮈로니테스 등을 제압했다. 페리클레스는 민주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시민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민문화를 고양시키는 데 온힘을 쏟았다. 그래서 시민들로 하여금 수준 높은 연극을 관람하게 했고 공동체의 연회에 참가해서 예술적 안목도 높이게 했다. 그는 예술이야말로 “맑은 영혼”이기 때문에 방종과 일탈이 예술의 옷을 입는다거나 예술가들이 정치에서 선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반 예술이라고 질책했다.

2. 민주주의 제도와 전쟁의 대비

그는 18세 이상의 남자들로 민회를 구성했으며, 행정을 맡은 5백인회를 10개 분과위원회로 나누어 한 위원회가 1년의 10분의 1씩 책임지게 했다. 국가원수는 명목상 5백인회의 분과위원회 의장이 맡도록 했으며 사법제도는 6천 명의 배심원과 재판관으로 구성했다. 이처럼 시민 주도의 민주정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기울인 결과 아테네 민주주의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대단히 신중하게 결정했다.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모색했고 항상 전쟁의 파괴와 살육에 마음 아파하면서 과격파의 호전적인 목소리를 무책임한 선동으로 배격했다. 그만큼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아테네가 시민들의 단결과 튼튼한 국방으로 스파르타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이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을 때는 냉정을 찾게 했고, 의기소침했을 때는 이들의 사기를 고무시켜주었는데 그 한 사례가 바로 사모사 전쟁이다. 사모사와의 개전 초기에는 아테네가 패전했는데 사모사는 포로로 잡은 아테네 병사들의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등 치욕을 가했다. 이 소문이 아테네로 전해지자 사람들은 매우 분노했다. 페리클레스도 격분하여 직접 함대를 이끌고 사모사로 출진해서 9개월의 공성작전으로 그들을 정벌하고 아테네 사람들의 치욕감도 씻어 주었다.

3. 위대한 웅변가

페리클레스의 '격조 높은 연설'은 '영혼을 울려주는 정감의 소리'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2년째인 BC 333년에  '전몰자 추모 연설'에서 애국심에 대해 연설했는데 그 중 한 두 구절을 여기에 인용해 보기로 하자. “전몰자 부모님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로 위로를 드립니다.…자식을 잃은 슬픔은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슬픔입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행의 아픔도 쓰라리지 않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행복을 상실하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식의 생명까지 나라에 바치지 않고서는 평화도 평등도 자유도 누릴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테네를 위해 죽은 그 젊은이들로부터 가장 큰 행복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이 소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있습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공적으로 책임지는 자리를 맡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나 계급, 학벌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4. 올림포스의 주인

그러나 위대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도 말년의 불운은 어쩔 수 없었다. 수많은 아테네 시민과 군인들이 심한 역병에 감염되자 시민들은 그 책임을 물어 그를 불신임했다. 게다가 역병은 그의 가까운 친구들과 그의 후원자인 누이와 아들까지 빼앗아 갔고 그마저 우울증에 떨어지게 했다.
바로 그 때 아테네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에게 다시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변덕을 싫어하면서도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병이 페리클레스 자신을 급습했다. 그의 병상을 찾은 시민대표들은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에 대한 헌사”를 바치면서 그를 기리는 전승기념비가 아테네에만 9개가 넘는다고 찬탄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눈을 뜨면서 “내가 그 많은 일에 성공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업적이 있다면 장군으로서 늘 조심했기 때문인데 그 덕에 아테네 사람들도 죽음의 상복을 덜 입을 수 있었다!”라고 말한 후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뒤 아테네 시민들은 그에게 "올림포스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민회에서는 페리클레스야말로 "역사에서 영원히 숭앙해야 할 위대한 지도자"라고 의결했다. 그는 재산을 축재하지도 않았고 파당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철저하게 겸허했다. 그러면서도 시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오직 유족한 시민 생활만이 올바른 정치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불세출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 속에서 영원히 추앙받을 수 있게 되었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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