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스로를 이룩했던 인물

위대한 정치가들은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 설 수 있었을까? 세습군주로 넓은 땅을 정복했기 때문이었을까? 정치적 음모와 정략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자비하게 정적을 처형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물음에는 대부분의 경우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 하늘이 ‘위대한 정치가’를 점지했던 경우도 그냥 만들어놓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그렇게 점지 받은 지도자를 찾을 수도 없다.

실제로 위대한 정치가도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어릴 때는 대단히 여린 면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큰 깨달음을 얻어 당금 질하듯 스스로를 단련했기에 위대한 지도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야말로 ‘스스로를 이룩했던 인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체득한 판단력과 실천으로 정치의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이들은 ‘옳은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참고해야 할 수 많은 전범을 찾아나서는 만권의 서책을 섭렵했으며 대학자의 논리도 경청했다.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눈여겨보았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데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매우게 되었고 더 큰 정치적 효과를 이루기 위해 앞장설 수 있었다.

그처럼 위대한 정치가들도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으며 그 때문에 유달리 종교적인 구원에 매달릴 때가 많았다. 물론 이것이 자신만의 복락과 사후 세계를 위한 기원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보다는 종교적 가치관에 따른 ‘섬기는 자의 일상’이야말로 신 앞에 무릎 꿇는 종복이자 사람을 섬기는 ‘제일의 신복’임을 다짐하는 종교적 경건함이었다. 또한 현실 정치의 어려움을 해결할 실마리를 지난날의 역사와 정치철학에서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역사적으로 지혜의 축적인 고전 탐독에도 밤을 새웠다. 그 때문에 이들이 읽었던 고전 탐독은 오늘 우리사회에서 빚어지는 ‘입시’나 ‘돈벌이’를 위한 고전 읽기와는 달랐다. 사실 이런 식의 고전 읽기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고전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고전을 통해 옳고 그름의 잣대를 정확하게 마련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일상에서 실증적인 명증성을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고전 독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2. 지적 기반과 실천지향
말이 적잖게 딴 길로 접어들었지만, 위대한 정치가에게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도 찾을 수 있다. ①지도자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준비했다. ②시대나 세상을 바르게 이끌 수 이념과 방략도 미리 마련했다. ③이들 방략을 실천할 유능한 동지도 확보했다. ④자신의 통치가 피지배층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도 가졌다.

특히 이들의 통치과정에는 고통에 놓인 사람들을 그 자신 속에 받아 들여서는 그들의 소외감이나 분노감을 달래주는데 진력함으로써 다 함께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는 ‘올바른 다스림’을 이룩하려했다. 그 때문에 위대한 정치가의 일상은 사실상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성자와도 같았다. 이러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기에 마침내 ‘위대한 정치가’로 올라설 수 있었고, 그가 설계한 정치적 목표도 하나하나 실천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위대한 정치가들의 정치나 정책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지향가치가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①전쟁과 갈등을 넘어 평화를 최고로 중시했다. ②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을 보장하는 것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삼았다. ③결정하되 군림하지 않고 다스리되 통치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연대와 협력의 정치에 힘을 다했다. ④차이와 차별을 구분하면서 다름도 수용함으로써 올바른 평등을 확립하려했다. ⑤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지향하는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위에 적은 5가지의 지향성, 즉 평화지향, 행복실현, 협력적 연대, 평등의 확보, 생명주의야말로 위대한 정치가의 굳건한 이념적인 기반이었다. 물론 이들 이념을 정치적 연설문에나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위대한 정치가’로 올라설 수 없을 것이며 기껏해야 ‘흉내 내는 정치인’으로만 머물게 된다는 사실만은 여기서도 거듭 말해두고 싶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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