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행복(본지 논설위원/한양대 교수)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공평해지고 인류의 발전은 빨라진다. 과거제도의 경우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는데, 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상승을 가능케 한 것이 과거시험이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삼대(三代)가 내리 과거시험에 합격한 가문이 전무할 정도였고, 그리하여 문벌귀족들이 추천제도를 통해 유지해 오던 신분세습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과거시험 합격으로 얻어진 가문의 위상 또한 삼대 이상 세습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아이의 사회적 신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사회적 지위에 관건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될 ‘학벌’이 당사자의 노력보다는 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강남 지역 학생의 서울대 진학률이 강북 지역의 몇 배에 이른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빚어졌는가? 공교육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국이 OECD 회원국 중 사교육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나라가 됐고, 사교육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보다 좋은 학벌을 만들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대학은 학부든 대학원이든 돈이 없으면 학교를 다닐 수조차 없다. 특히 대학원 과정의 경우, 지적역량의 주력인 학문후속세대를 기르는 과정이고,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갈 나이가 지난 학생들이 공부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학부보다 풍부한 장학제도로써 열정과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생활 걱정 없이 공부에 매진하도록 해야 한다. 옛날에도 늠공생(廩貢生)이라는 국자감 학생들에게는 가족들의 생활비까지 제공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학생에게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지움으로써 상당 부분의 창의력을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다. 강의를 담당하는 시간강사들에게는 학부를 갓 졸업한 학생들보다 적은 급여를 주면서도 학문의 열정을 붙들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대학교육의 80%를 사립대학에 의존함으로써 고등교육 비용의 25% 정도만을 정부가 부담하고 있다. 67% 정도를 정부가 부담하는 OECD국가 평균치에 훨씬 못미치는 수치다. 대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OECD 국가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데, 이러니 대학등록금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문제시되자 이른바 ‘반값 등록금’이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등록금이 반토막으로 줄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지원 혹은 재단으로부터의 전입금이 두 배로 늘어야 하 않겠는가?

하지만 고등교육 예산은 여전히 미흡하다.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10조 5341억원이 2015년도 고등교육 예산으로 배정됐다고 한다. 현 정부가 출범할 당시 약속했던 ‘GDP대비 1% 수준인 12~13조원’에 이르려면 20% 남짓 더 증액돼야 하며, OECD 평균 수준에의 도달은 아직 생각할 수조차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부지원이 미미한 현상황에서 대학을 대학답게 운영할만한 재정적 역량을 가진 사립대학 재단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사립대학 법인들의 80%가 법정기준을 충족하는 수익용기본재산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반값등록금을 위한 자체준비금의 마련을 요구한다면, 교육과 연구 여건의 악화를 통한 지출 축소가 유일무이한 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그 사회적 위상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 투자의 확대를 통해 교육의 형평성을 이루고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구성원들에게 고루 부여하면, 이는 국가사회의 발전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교육으로부터의 소외는 정부가 나서서 해소해야 하며, 고등교육 역시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교육비용의 대부분이 개인에게 전가돼서도 안 되고, 여건을 구비하지 못한 주체에게 교육기관의 운영이 맡겨져서도 안 될 것이다. 고등교육 예산을 획기적으로 증액함으로써 OECD 평균 수준의 고등교육비가 공적으로 조달돼야 하며, 부모의 재정적 능력보다는 학생 본인의 공부에 대한 열의와 자질에 따라 교육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 대학 교육의 공공성 회복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양질의 교육’보다는 ‘살림’을 앞세우는 대학경영이 판을 치는 상황을 마감시켜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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