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일민주의 사상'…3공화국 근대화 위한 '인간개조운동'

새 정부는 출범때마다‘교육개혁’을 으뜸 과제로 내걸고, 교육부 수장에 대해서는‘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하겠다’고 공언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지금까지 정권 교체나 정치적·사회적 사건, 자질 논란 등으로 인해 개각 때마다 교육부 장관이 교체됐다. 암흑한 군사정권 시절은 제쳐두고라도 한해에 두세 번 장관이 갈릴 정도로 우리 교육계는 부침이 심하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이끌 수장이 잦은 교체로 연일 최단명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인 것이다. ‘문교부’에서‘교육부’(91년)로, 다시‘교육인적자원부’(2001년)로 문패를 바꿔 단 교육당국의 수장이 어떻게 지난 57년을 달려왔는지 들여다본다. ■이승만 정권의‘제1공화국’(1대 안호상~6대 최재유 장관)
해방 이후 50년대까지의 국내 교육 방향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주의를 확립하며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반공 체제 확립과 민주 시민 양성에 초점을 두었다. 초대 내각에서 1년9개월간 재임, 최장수 장관으로 꼽힌 안호상 1대 문교부 장관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부연시킨 민주주의 민족교육을 문교정책으로 정하고, 반공정신을 확립키 위해일민주의사상보급에주력했다. 이를 위해안장관은‘학도호국단’을설치했다. 50년 5월, 2대 장관에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조선교육심의회 설치나 교육법 제정 등 해방후 교육기틀 마련에 공이 큰 연희대(연세대) 백낙준 총장이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후 50여일만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백 장관은 전시 문교방침으로 도의교육, 1인1기교육(기술교육), 국방교육을 표방했다. 전쟁중에 선임된 김법린(3대) 장관은 전후 상황을 수습·복구하기 위해‘건국·전시·독립문교’라는 문교시책을 천명했다. 그러나‘한글간소화 파동’으로 54년 2월 사임했다. 그후 정부는 70일만에 공석이던 제4대 문교부장관에 이선근(4대) 당시 단국대학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 장관은 56년 6월 5일 국회에서 한글파동 야기, 미국원조물자의 부정처분, 인사발령 부정, 잡종학교 대학승격의 부정 등 30여개 항목에 대해 불신임안이 통과돼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뒤를 이어 문교부 과학교육국장, 문교부차관, 서울대 총장 등을 역임한 문교행정가 최규남(5대)씨가 한달만에 문교부 장관에 발탁됐다. 최 장관은 생산교육(과학기술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사범학교를 2년제 사범대학으로 개편하고 국민학교의 과외수업을 폐지했다. 6대 장관은 보건사회부장관과 이화여대 부총장을 역임한 최재유씨가 맡았다. 최 장관은 의무교육 6개년 계획과 과학·기술교육을 적극 추진했다. ■4·19혁명 이후‘제2공화국’(7대 이병도~9대 윤택중 장관)
4·19이후, 허정 과도정부는 4월혁명의 여파를 극소화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60년 4월 허정 과도정부와 함께 제7대 문교부 장관으로 이병도씨가 취임, 8월13일 신정부(제2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약 4개월간 문교시책을 담당했다. 이 장관은 학원의 정치도구화 등을 철저히 배격할 것을 천명하고, 3대 교육방침으로‘학원 정상화, 사도 확립, 교육 중립성 확보’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장관은 70년대 중반‘조선사편수회’에서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에 기여한 인물로 밝혀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후 60년 7·29총선거에서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문교행정 쇄신을 위한 시책으로 혁명정신에 입각한 문교정책 구현과 교육의 질적 향상, 국민문화의 진흥 등에 중점을 두겠다며, 제8대 문교부장관에 오천석씨를 임명했다. 오 장관은 문교정책으로 학원의 민주화, 지방분권을 통한 행정의 민주화, 교육의 질적 향상을 내세웠다. 후임 윤택중(9대) 장관은 실업교육, 교육자치제, 대여 장학금제도, 재일교포 교육 강화 등을 정책으로 표명했다. 그러나 5·16군사 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면서 17일만에 물러나야 했다. ■5·16쿠데타와‘제3공화국’(10대 문희석~19대 홍종철 장관)
5·16군사쿠데타 이후 63년 민정으로 이양되기까지 2년7개월간 군사정부는‘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그 선행조건으로 ‘인간개조’운동을 강력히 추진시켰다. 61년 9월 1일 공포된‘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특례법)은 문희석(10대) 장관에게 학교나 학과 및 정원의 정비 또는 재조정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다. 김상협(11대) 장관은 대학교육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사를 실시했으나, 정원 미달이 속출하자 63년도부터는 국가고사를 대학입학 자격 여부만 부여토록 했다. 후임 박일경(12대) 장관은 교육공무원 정년을 다시 65세로 환원했으며, 이종우(13대) 장관은 국가고시제를 폐지하고, 문희석 장관 시절 공포된 특례법을 보완해 사립학교법을 공포했다. 고광만(14대) 장관은 특례법에 의거, 61년 2월 일반행정에 병합됐던 교육자치제를 2년만에 부활시켜 시·도 교육위원회를 발족시켰다. 64년 3월 부터 5월까지는 5·16 군부의 대일굴욕외교에 반발한 학생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이에 정부는 군부대 출동에 이어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학생시위와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의 강경한 행정조치 등이 감행되는 가운데 윤천주(15대) 장관은 취임 3개월여만에 전 국무위원 일괄 사퇴에 따라 사임했다. 정부는 곧 법무부차관 권오병(16,18대)씨를 후임에 발령했다. 권 장관은 삼성 밀수사건 등으로 당시 내각이 일괄 사표를 제출함에 따라 잠시 법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권오병 장관은 후임 문홍주(17대) 장관에 이어 18대 장관으로 재취임한 직후 67년 6월 28개 대학과 57개 고교에 휴학령을 내리는 등 각종 학생운동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69년 4월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는 파동을 겪으면서 경질됐다. 19대 홍종철 장관은 전문학교 설치, 대학 교양학점의 상향 조정, 교육대 학생 전원 모든 학비 면제 결정등의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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